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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구 교수 칼럼 - 십자가 없는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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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등록일
- 2020-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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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한 세대 앞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매우 다르다. 현격하게 다른 점은 아마도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차이일 것이다. 컴퓨터가 일반화되어 있고, 텔레비전 시청은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게다가 핸드폰의 빠른 진화는 어떤 정보라도 일순간에 살펴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젠 어지간한 책과 문서들은 자료 검색을 통하여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손 전화를 장착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항상 세계를 향해 열려있다. 열려진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사람들과 그러므로 참 다르다.
정보를 주고받는 열려진 삶의 구조를 차단하는 일은 그야말로 비장한 각오 없이는 실행할 수 없다. 실수로 핸드폰을 잃어버린 경우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 즉 고독과 침묵의 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정보통신의 발달의 수혜자가 된 우리는 넘실대는 정보의 홍수에 떠밀리면서 살아간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침묵의 시간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나 자신과의 대면, 혹은 자연과의 대면, 그리고 하나님과 만나는 침묵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핸드폰이라는 조그만 창을 통하여 외부 세계와의 접속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즐기고 선호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 익숙하다. 부담되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다. 버스를 타도, 전철을 타도, 엘리베이터를 타도 우리는 헨드폰을 들여다보며 즐거움을 찾는다. 심지어 대학의 강의시간이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만 있으면 심심하거나 무료한 시간을 얼마든지 메울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양식에서 우리가 이기적으로 즐거움을 선택하는 데 빠지는 대신 자신과 직면하여 홀로 머무는 시간을 상실하고 있다.
핸드폰의 진화와 더불어 우리가 주고받는 정보의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음성통신이나 문자를 주고받던 상태에서 더욱 진화하여 영상문화를 개별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던 침묵의 시간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시적 언어가 남기는 여운, 그 해석의 지평에서 의미를 찾아내던 우리의 능력은 눈앞에 보이는 적나라한 화면을 통하여 자극적이고 즉발적으로 반응하는 능력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시각적 인식능력은 탁월해 지고 있지만 우리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줄어들고 있다. 사유의 증발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갇힌 존재들이 되어가고 있는 우리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침묵을 견디지 못하며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존재들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은 컴퓨터 화면이나 핸드폰 화면,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에 고착되어 영상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기실 우리가 접하는 화면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생생뉴스“라는 용어를 쓴다 할지라도 사실에 있어서 영상문화는 리얼한 세계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면밀하게 기획되어 조작된 세계인 까닭이다.
화면을 통하여 우리가 취하는 정보는 자연의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취사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냄새가 나지 않는 비현실, 사이버스페이스에 비쳐지는 그림자를 우리는 실제의 세계와 혼동한다. 영상이 증폭하여 과장하는 세계는 사실에 있어서 리얼한 정지된 세계와는 달리 너무나 빠르게 이동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들여다보며 영감을 얻어 시를 쓸 수가 없다. 이렇듯 우리는 침묵의 시간과 홀로 머무는 고독, 그리고 실제 세계를 직면하는 의식이 점차 퇴화하여 시적 언어를 망가하며 비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의 영적 감수성도 변해가고 있다. 침묵보다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 더 자극적이고 영성적이며, 홀로 있음의 고독한 순간보다 대중적 집단과 함께 어울릴 때 더욱 감흥을 느끼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심지어 대중의 흥을 자극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도, 기도도, 예배도 극화하는 성향을 유통시킨다. 대중화된 예배 그 속에서 목회자와 신도들은 인격적인 만남이 아니라 피차에 익명의 존재로 만난다. 인격적 관계 맺기 자체가 불가능한 일대 수천, 수만, 심지어 수십만 명의 관계란 사실 인격적 관계를 포기한 관계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화, 대형화의 경향 속에서 인격성을 상실한 목회가 일어나는 것은 여간하여 피할 수 없다. 인격적 만남이 아니니 목회자는 기능적 역할을 하면 그만이다. 침묵과 고독의 길, 진실과 정직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침묵과 고독과 번민과 기도의 자리, 정직과 진실과 진리가 선포되는 자리가 아니라 대중의 요구에 따라 속된 축복과 값싼 은혜를 파는 자리가 되어간다. 하나님의 뜻 대신 사람의 뜻이 지배하는 교회로 전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전근대적인 가족 이기주의의 포로가 되어 목회권을 인친척간에 주고받는 사람의 교회가 되기도 하는 이유다.
어쩌면 오늘의 세대는 영상적 대중문화가 없으면 무료하여 감동을 얻기 어려운 테크노 세대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침묵과 고독의 시공간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실존의 벌거벗음이 없이 대중의 흐름 속에서 아무성치며 체험하는 하나님 신앙은 과연 어떤 정조를 가지는 것일까? 여기에는 깊은 물신주의와의 속된 타협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신앙에 익숙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대중이 없는 고독한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려워한다.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동원한 확성기를 통해 증폭된 소리에 자극되지 않으면 인식능력이 취약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거대한 화면과 같은 강단이 없는 곳에서는 영성적 파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문화가 오늘의 무수한 기독교인들을 대형교회로 몰아가는 지극히 세속적인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흐름을 만드는 문화는 머잖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라한 목회 현장을 향할 우리 신학생들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인이다. 외진 목회현장에는 그런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은 내밀한 침묵 속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시선, 무한한 공간과 시간 앞에 서는 고독,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가치를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생명력이 있다. 홀연히 들려오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던 모세의 빈 들판, 고독한 길을 가던 야곱의 돌베개,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고뇌하던 이사야의 화롯불, 그리고 번민에 휩싸인 예수의 겟세마네 동산이 없다면 하나님 신앙과 기독교의 진리는 제대로 해명되기 어렵다.
한반도 전쟁의 포화가 쏟아지던 자리에서 정말 아무것도 없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이 한국교회다. 목회자들은 민족의 고통을 안고 번민했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절규했으며, 새롭게 세워질 조국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 백성의 정의와 정직과 진리를 증거 했다. 그 땐 빈 들판에 천막을 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여기 저기 십자가를 세우면 그 자리가 거짓이 없는 진실의 자리라고 사람들이 여겼다. 제아무리 초라해도 십자가 앞은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곳,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 고독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곳, 우리의 오만과 탐욕이 벌거벗겨져 모든 죄가 드러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직면해야 하는 자리, 나의 존재와 하나님이 만나는 은총의 자리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한국교회의 생명력을 키우고 성장시켜왔던 그 영성의 자궁을 통째로 걷어내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이 세운 업적을 내세우며 탐욕을 부리고, 화려한 물신주의를 담은 축복을 선포하며, 대중의 환호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인격성을 상실한 교인의 숫자가 영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에서 우리가 이질성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오늘의 문화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문화적 코드, 즉 대중성, 시각적 감수성, 그리고 화려함에 대한 물신 숭배적 유혹을 비판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기의 막다른 언덕길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의 제자의 길이란 영광의 길인가 십자가의 길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할 뿐 이 세상 그 어느 누구, 설령 국왕이라 할지라도 머리를 숙일 수 없다고 했던 윌리암 펜이 영국 국왕 모독죄로 런던탑에 갇혀 썼던 책, 그 책의 제목이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 "No Cross, No Crown!"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길에서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은 택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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