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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문회활동

감신대 총동문회장 ‘찾아가는 심방 5' 삼남연회

작성자
대학대표관리자3
등록일
2024-02-16 11:49:23
조회수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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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으로 목회의 본을 세우는 동문들을 격려하며 눈물로 축복하다!

예년에 비해 늦게 시동을 건 장마는 시작과 함께 많은 비를 남부지방에 뿌렸다. 곳곳에서 도로가 끊어지고 산사태와 매몰로 인명피해까지 났다. 빗물폭탄이 끊임없이 쏟아지던 지난 5일(월)부터 7일(수)까지 감신대 총동문회(회장 이기우 목사)는 ‘찾아가는 심방’ 다섯번째 순서로 삼남연회와 호남특별연회 동문들의 목양지를 방문했다. 온 지면을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쏟아지는 빗물도 동문들을 찾아 격려하고자 한 ‘애정의지’를 막지 못했다.

총동문회장 이기우 목사를 비롯해 부서기 정택은 목사, 회계 민경신 목사, 부회계 최창원 목사 등은 5일(월) 오전 8시, 감람교회에 모여 기도한 후 남도를 향한 ‘찾아가는 심방’ 여정을 위해 출발했다. 이번 일정은 5일 삼남연회 진주지방 영신교회(정만영 목사)와 완대리교회(여승훈 목사), 부산서지방 부암교회(문영환 목사, 삼남연회 동문회장)를 심방하고 6일 호남특별연회 전남동지방 선한목자교회(조대성 목사, 호남특별연회 동문회장), 전남서지방 해남새롬교회(이호군 목사, 호남특별연회 총무)를 방문한 후 7일 서울 복귀로 진행했다. 

이기우 목사는 2박 3일 동안 동문들이 섬기는 5개 처의 교회를 들러 돌아볼 때마다 격정 넘치는 마음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했다. 특별히 어려운 환경과 지역에서 ‘부르심’에 따라 사명감을 놓치지 않고 장기간 동안 정주(定住) 목회하며 지역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는 동문들이 자랑스럽다며 연신 감동의 눈물을 보였다. 오늘은 제1편으로 삼남연회 동문들과의 만남을 전하고, 제2편 호남특별연회 동문들과의 만남은 내일 전하기로 한다.  



 

▣ 진주지방 영신교회(정만영 목사, 82학번)

정만영 목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90년으로 올해 31년 됐다. 거창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정 목사는 이곳에서 개척을 했고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천막으로 하우스를 만들어 시작한 목회는 아담한 벽돌 예배당으로 발전했고, 7년 전에 지금의 교회를 건축하여 새로운 역사에 대한 꿈을 키우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삼남연회에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시골교회 정주목회의 샘플이 되고 있다.  


정 목사는 두 살 되던 해, 친구들의 장난으로 낙상하여 다리를 다쳤다. 제때 치료하지 못해 지금까지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됐다. 그 사고를 계기로 부친이 교회 출석을 하게 되었고, 정 목사도 어린 시절 부친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녔다. 부친은 뒤늦은 나이에 감리교회에서 신학공부를 마쳤으나 연령 제한으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고 장로교회에서 안수 받고 목회하다가 은퇴했다. 그렇게 은퇴한 부친이 교회를 건축하라며 헌금한 4,200만원으로 현재 교회가 자리한 700평 땅을 매입했다. 그것이 지금의 예배당 건축의 마중물이 됐다.

땅을 매입할 즈음에 교인들의 마음에는 한결같이 예배당을 짓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고 정 목사는 전했다. 교회 건축을 결의하는 당회에서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100% 찬성했다는 것이 그 반증이라고 했다. 그만큼 제대로 된 예배당을 갖고 싶은 마음이 모든 교우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건축을 결의한 교우들은 작정헌금을 하기 시작했고, 한 명씩 한 명씩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건축을 진행하면서 정 목사는 하루 세 번 기도회를 하며 기도를 앞세웠다.

그렇게 교우들이 1년 동안 모은 건축비가 5억원이었다는 말을 들을 때는 귀를 의심했다. 도시교회나 역사가 깊어 신앙의 가계가 이어지는 교우가 많은 것도 아닌 시골교회에서 그만한 액수를 모은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을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린 교우도 있고, 20년 동안 납입해 만기로 받은 적금(1천만원)을 온전히 드린 교우도 있다. 그 교우는 적금액의 십이조(20%)를 드릴려고 했는데 기도하는 중에 온전히 드리라는 음성을 듣고 전액 드렸다고 한다. 도시교회에서 목회하는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성령의 음성에 고스란히 순종하는 교우들의 실천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시교회의 교우들의 ‘안일한’ 신앙생활에 대해 재고해 보는 기회가 됐다. 

또 다른 교우는 6백만원 적금을 전액 헌금하기도 했고, 공공근로를 통해 모아 둔 30만원, 50만원 등을 ‘하나님의 집’ 상량(上梁)에 올려 드렸다. 모두가 눈물겨운 헌신이었고 희생이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고 애틋했다는 것이라고 정 목사는 담담히 설명했다. 이러한 헌신의 대열에 목회자가 빠질 리 없었다. 정 목사는 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장로를 찾아가 교회건축헌금으로 하려고 한다는 이유로 1억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매월 일정 금액씩 갚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일주일 동안 기도한 장로는 자신의 아파트를 담보로 하여 2.3% 저율로 1억원을 대출받아 정 목사에게 건넸고 정 목사는 건축헌금으로 드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매월 100만원씩 갚아 나가고 있다. 교회 건축을 시작하면서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멸치 판매’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멸치를 팔아 매월 100만원씩 갚아 나가고 있는 것이다. 건축 초기에는 고구마를 심어 200만원의 수익을 냈고 건축비로 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2014년, 공사가 시작됐다. 약 5억원으로 골조 공사를 마감하고 건축비가 떨어지면 다시 헌금하고 멸치를 팔아 모인 재정으로 공사를 이어갔다. 몇 차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1층(150평)에는 식당과 사무실, 다목적실 등이 자리했고 2층(120평)에는 예배당(250석)과 자모실 등이 자리했다. 그리고 일종의 대안학교를 운영할 생각으로 천정에 일정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정 목사는 향후 젊은이를 위한 목회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소요된 총비용 14억 중에 대출금은 4억이며 그 중 5천만원을 상환했다며 교회가 수 년 내 감당할 수 있는 규모라고 했다. 현재 영신교회는 주일 출석 50~60명이다.  

32년째 한 곳에 살아가고 있는 탓에 정 목사는 특별한 경험도 했다. 마을 이장으로 2년 동안 섬긴 것이다. 영신교회가 자리한 마을에는 33호가 있다. 주민들의 요청으로 이장직을 맡아 마음의 대소사를 주관하며 지역을 섬겼다. 성탄절에는 모든 주민들을 초청하는데 자리가 없을 정도로 들어 찬다. 어떤 이는 30분 떨어진 거창읍에서 오기도 한다. 정 목사는 이장직을 전도하기 위한 봉사의 기회로 삼았다고 했다. 31년이 되다 보니 중고생 시절에 지도했던 이들이 지금은 교회의 든든한 일꾼으로 성장해 있다며 장기목회의 보람이라고 겸연쩍어 했다. 

앞으로 은퇴하기까지 청소년사역과 노인복지를 위해 준비해 갈 것이라고 밝힌 정 목사는 주간보호센터와 요양원 유치 등에 대한 계획도 있다며 들려줬다. 다만, 요양원은 교회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못되기에 원하는 이들에게 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요양원에서 잘 섬기다가 하나님나라로 배웅한다는 생각이었다.

인정 많은 ‘시골 아주머니’ 같은 인상을 주는 박연숙 사모는 시종 함께 하면서 구(舊) 성전은 주민들을 위한 일에 사용 할 계획이라고 일러 줬다. 새로운 예배당을 완공한 이후 영신교회는 지방을 섬기는 일에도 열심을 냈다. 연합성경학교 유치(150명)하여 광림교회에서 교사 지원을 받고 영신교회 교우들이 식사 봉사를 했다. 또한 여름수련회 장소로도 대여했다.(100~150명 유치 가능) 어떤 때는 YMCA가 주관한 ‘자전거 타기’ 행사 시에 잠시 들러 쉬는 장소로 대여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지역사회와 적극 소통하며 함께 가는 교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정 목사와 박 사모의 목회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기우 목사는 “미래지향적인 꿈을 안고 있기에 교회를 크게 지은 것이 이해된다”며 어려운 곳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잃지 않고 31년 동안 지역주민들과 함께 해 온 자랑스런 동문이 되기에 손색 없다고 격려했다. 그 마음으로 뜨겁고도 간절하게 정 목사 내외와 영신교회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했다. 


 

 

▣ 진주지방 완대리교회(여승훈 목사, 86학번)

교회가 보이는 곳에 이르러 이기우 회장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삼남연회 진주지방에서 목회했던 민경신 목사 정택은 목사는 이전부터 완대리교회와 여승훈 목사를 알았지만 첫걸음이었던 이기우 목사는 한옥 모양을 하고 있는 완대리교회 모습에 반했던 것이다. 완대리교회는 덕유산 자락에 한옥 모양으로 자리잡고 있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여 목사는 감신 86학번으로서 삼남연회에 내려와 26년째 목회하고 있다. 완대리에는 1999년 부임하여 23년째 섬기고 있다. 특유의 입담과 소탈함으로 지역민들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여 목사에게도 아픔이 있다. 어린 시절, 사고로 인해 다친 왼쪽 발이 지금까지 불편하다. 정상적인 살이 돋아나지 못해 괴사가 시작되었고 작년 초에는 서울대병원과 삼성병원에서도 더 이상 정상으로 돌아오기 어렵다는 판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 말을 하면서도 여 목사는 “한 40년 잘 썼죠 뭐.”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미소를 잃지 않을 정도로 긍정적이었다. 


목발을 짚어야 할 정도로 악화되어 포기하듯 기대를 접었던 발인데, 이상하게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날 자신의 발을 보이면서 여 목사는 ‘기도의 힘’이라고 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이라며 갚지 못할 빚을 졌다고 했다. 실제로 여 목사의 발은 작년 초 “절단해야 할 때 오라”고 했던 의사의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여 목사는 일명 ‘환경지기’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살리기 위한 일에 관심이 많다. 그런 마음으로 지역 내 유해물질 배출 감소를 위해 20년 전부터 플라스틱 등을 소각하지 않고 직접 수거하는 수고를 지속해 왔다. 2004년부터는 생태화장실 운영을 통해 자연친화적 퇴비로 전환하는 일과 교회의 각종 용지를 재생용지로 전환하기도 했다.

직접 농사도 짓는 여 목사는 트랙터도 몰고 2006년부터 유기농 재배에 참여하기 시작해 2009년에는 친환경 농법으로 사과를 재배했다. 특히 2013년부터는 본격적인 친환경 작업에 돌입해 한옥 예배당(사택도 부쳐)을 손수 건축하고 게스트 하우스, 기도실 등 교회관련 모든 건축물을 흙과 짚, 나무 등 자연 재료만을 이용해 친환경으로 했다. 모든 난방은 우리 전통식인 구들난방으로 설비해 화석연료와 함께 사용하고 있다.

예배당에 갖추어 놓은 갖가지 성물들은 ‘우리의 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녹색교회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 목사는 당시 시상식에서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한국교회의 목회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 대한 청지기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고민했다”며 “우리가 지금 살고 있고 앞으로 자손들이 살아야 할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생태를 생각하는 목회와 성도들의 자세가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소감을 밝혔다.


특유의 ‘너털웃음’을 잘 짓는 여 목사와 함께 사모도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으로 진주지방을 찾았다는 이기우 회장을 위해 직접 내린 커피와 각종 과자, 수박 등 ‘풍성한’ 간식상을 내왔다. 그리고 다음 일정을 위해 떠나는 일행에게 그 모든 것을 ‘도로용 간식’으로 싸 주기도 했다. 아쉬운 마음을 털어내고 헤어지기 직전에 이기우 회장은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오랫동안 정주하며 특색 있는 목회의 자리를 지켜 온 여 목사를 격려했다. 

특히 한 쪽 발의 장애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밝음’을 잃지 않고 의미있는 목회를 하면서도 어려움 속에서 네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했다며 격려했다. 무엇보다 생태환경을 생각해 한옥예배당을 손수 세웠다는 점에서 놀랍다며 온 마음으로 여 목사와 가족, 완대리교회를 위해 축복기도했다. 이 회장의 기도에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쳐났고 축복의 부분에서 목소리가 고조되어 떨리기까지 했다. 기도를 마친 이 회장은 “곳곳에 이처럼 꿋꿋한 모습으로 목회의 샘플이 될 정도로 자리를 잘 지켜가는 동문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찾아가는 심방’을 통해 눈으로 보고 만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고 감회를 밝혔다.

아쉬운 만남을 뒤로 하고 일행은 다음 일정인 부산으로 향했다.



 

 

▣ 부산서지방 부암교회(문영환 목사, 82학번) 

올해 10월이면 창립 70주년을 맞는 부암교회는 부암동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70년 전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1950년, 남북 전쟁의 화마가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후 낙동강 전선 이하 부산지역만 남았을때 피난민들이 대거 몰린 부산에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들이 생겨났다. 현실의 고되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데는 신앙의 힘만큼 좋은 것이 없다. 더구나 부산은 삼남연회의 구심점이었지만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 협정으로 호주장로교 선교지역이 된 까닭에 상대적으로 감리교회가 약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와중에 피난민들 중심의 교회가 설립된 것은 선교지역 확대 측면에서도 긍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곧 1951년 10월, 부산진구 부암동 언덕길에서 예배드리던 피난민들이 부암동 128번지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박백룡 목사를 초대 담임으로 초빙하여 설립된 교회가 부암교회(문영환 목사)다.


교회 창립 58주년이던 2009년 10월, 제9대 담임으로 부임한 문영환 목사(감신 82학번)는 교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목회하고 있다. 장로교회의 영향이 큰 부산에서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셈이다. 부암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언덕은 부산의 대표명사로 꼽히는 서면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거리도 지척(咫尺)이다. 교회 바로 아래에는 동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김해공항이나 부산역으로 가는 교통도 용이하다. 타교파에 비해 선교 여건이 분명한 열세인 환경에서 문영환 목사는 지역민들을 섬기는 사랑의 목회로 감리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삼남연회 동문회장이기도 한 문 목사는 임원들을 교회로 초대해 총동문회장의 방문을 함께 환영하며 임원들과의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하고 교회에서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애찬까지 준비했다. 게다가 교회를 서기는 9명의 장로들 중 4명이 나와서 총동문회 임원들과 연회 임원들을 맞이해 임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쌌다. 2시간 전부터 미리 모여 회의까지 마치고 총동문회장 일행을 맞이한 삼남연회 임원들은 총동문회장의 연회 방문을 환영하고 정책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건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착과 함께 저녁식사를 위해 교회 식당으로 이동한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담긴 식탁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총동문회 일행과 삼남연회 임원들은 문 목사와 부암교회 여선교회원들의 환대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만찬을 즐겼다. 동문회를 대하는 문 목사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육의 양식을 공급하는 행복한 시간이 아쉬움과 함께 정리되고 일행은 부암교회 예배당으로 옮겨 교회와 선교사역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1층 회의실로 옮겨 간담회를 가졌다. 먼저 회계 민경신 목사가 총동문회의 출범과정과 그동안 진행해 온 사업들을 설명하고 삼남연회 임원들의 협조를 구했다. 이어 이기우 회장이 인사와 함께 총동문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에 대해 설명했다. 


이 회장의 설명이 끝나고 문 목사가 자연스럽게 연회 임원들의 질의를 이끌었고 이기우 회장이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연회 임원들은 신학대학원 통합문제(제4의 대학원신설)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고, 이 회장은 감독회의에서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서 동문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 가을로 계획하고 있는 ‘With Concert’에 대해 자세한 안내를 요청했고 현재까지 진행된 계획안에 대해 설명했다. 한 임원은 총동문회가 진행하는 사업이나 행정적인 내용들을 동문회 홈페이지나 SNS 등에 적극적으로 올려 각 연회로까지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고 부서기 정택은 목사가 학교 홈페이지에 총동문회 섹션이 들어가도록 개편하고 있다는 점과 SNS 정보를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방안을 연구하겠다고 답했다.

삼남연회 임원들은 2시간 이상 소요되는 지역(경북 상주, 군위)을 포함해 진주와 포항, 진해 등지에서 모였다. 총동문회장을 비롯한 임원들과의 만남에 대해 어느 정도의 기대감이 있는지 느끼게 했다. 동시에 문영환 회장의 ‘소통하는 리더쉽’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의 새벽기도를 위해 다시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각자의 처지에 따라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다. 간담회를 정리하면서 이기우 회장이 총동문회와 삼남연회 동문회의 결속과 목양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할 것을 제안해 5분 동안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이 회장이 임원들의 목양지를 일일이 거론하며 구체적이고도 애절한 마음으로 축복하며 기도했다.

축복기도 후에 이기우 회장은 먼 거리에서 찾아 준 삼남연회 임원들에게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하고 총동문회가 동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고, 삼남연회 임원들도 부산까지 찾아 와 소통의 기회를 만들어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화답했다. 어느 임원은 총동문회장이 직접 연회로 내려와 임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인 것 같다며 특별히 감사하다고 전했다.

서울을 출발해 경남 거창을 거쳐 부산까지 약 500km를 이동한 이기우 회장과 총동문회 임원들은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자랑스런 동문들을 만난다는 기대와 설렘 덕에 마음은 훈훈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호남특별연회 동문들을 만나러 가는 다음 날의 일정을 생각하며 문 목사가 준비한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그렇게 ‘보람찬 하루’가 지나갔다.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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