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동문회활동
감신대 총동문회장 ‘찾아가는 심방 5’-호남특별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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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대표관리자3
- 등록일
- 2024-02-16 11:5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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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감으로 목회의 본을 세우는 동문들을 격려하며 눈물로 감격하다!
화요일(6일) 아침부터 부산지역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하려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게다가 뉴스를 통해 접한 소식은 이기우 회장과 임원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해남지역에 내린 비로 사망자가 생겼고, 도로가 유실되는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강진도 그렇고 다음 목적지인 순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계획한대로 일정을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처럼 크고 무겁게 다가왔다. 진행을 맡은 정택은 목사의 마음이 가장 무거웠다. 실세없이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렇지만, 의미를 담고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며 목회하고 있는 동문들에 대한 기대감은 장대비에 막힐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계획한대로 진행하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감사하게도 문영환 목사가 부산의 도로를 잘 안다며 손수 일행의 승합차를 운전하여 순천까지 동행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문 목사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평소 알고 지내던 조대성 목사의 목회지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며 동행을 자원했다. 덕분에 총동문회 회장단은 운전의 피로감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를 얻으며 체력을 충전할 수 있었다.
무섭게 내리치는 빗줄기를 뚫고 예정된 시각에 맞춰 순천 선한목자교회에 도착한 일행은 조대성 목사의 안내로 예배당에 올라가 기도했다. 그리고 조대성 목사로부터 그동안 걸어 온 목회의 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 순천 선한목자교회(조대성 목사, 감신대 83학번)
호남지역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조대성 목사가 전라남도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지도 어느덧 24년이 되었다. 1992년 전남서지방에서 신도교회를 개척해 목회의 길에 본격적으로 올라 타 만 3년의 사역 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예전 교육전도사로 사역할 때 최이우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체험한 후로 최 목사에게서 목회를 배우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지인의 소개로 최 목사를 만나게 되었고 안산광림교회에서 부담임목사로 사역하게 됐다. 조 목사는 당시 면접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면접에서 이것저것 묻던 최 목사가 조 목사에게 “얼마나 있을 수 있어요?” 라고 물었다. 안산 개발 초기에 개척하여 뜨겁게 목회했던 최 목사의 열정을 따르기 힘들었던 탓인지 부목사들의 ‘생명’이 길지 않았던 탓에 최 목사가 물은 것이다. 적게는 수 개월, 길어야 2년 정도 밖에는 견디지 못했던 터라 최 목사의 관심도 그곳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조 목사의 입에서 의외의 답이 나왔다. “얼마나 있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이야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시 목회자 세계의 분위기로는 있을 수 없는 ‘당돌함’이었다. 이제 막 목사 안수를 받고 부목사의 사역을 시작하려는 사람이 면접을 보는 담임목사 앞에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이었다. 최 목사도 놀라웠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5년이라는 숫자를 말했고, 조 목사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의 부목사 사역이 시작됐다.
모세의 ‘광야훈련’으로 생각하며 목회를 배웠던 그 시절이 자신의 목회에 큰 기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조 목사는 5년의 시간을 넘어 약 6년 동안 사역했고, 그 사이에 최이우 목사는 서울 꽃재교회(전 왕십리교회)로 옮겨 갔고, 부산에서 목회하던 유기성 목사가 담임으로 부임해 왔다.
다음 목회지를 향해 기도하던 조 목사에게 소위 ‘좋은’ 기회가 있었다. 유기성 목사가 분리개척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여 개척 장소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인디언선교사역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소천한 82학번 장두훈 선교사의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그것이 조 목사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안산광림교회 소속이었던 장 선교사였기에 장례를 준비하고 장례식에 참석하던 조 목사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인디언 선교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편한 목회를 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채찍으로 조 목사의 마음에 울렸고 그 즉시 분리개척이 완료되기 전에 어디든지 초청이 오면 ‘부르심’으로 알고 순종하겠노라 서언했다. 그렇게 서언한 조 목사에게 ‘부르심’의 사인이 온 곳은 호남특별연회 전남동지방 왕지교회였다. 서언한대로 내려가 두 번째 담임목회를 시작한 순천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왕지교회에서 약 7년 사역한 조 목사는 3년 동안 철야기도 하면서 20일 금식기도를 단행한 후 기약 없이 사임하고 다음 목회를 준비했다. 그리고 13년 전인 2008년 현재의 선한목자교회를 개척했다. 29년의 목회기간 중에 안산에서의 6년을 제외하고 23년을 전라도에서 목회하고 있는 셈이다. 다가오는 7월 18일이 창립 13주년 되는 날이다.
선한목자교회는 개척과 동시에 건축의 은혜가 있었다. 분리개척의 기회를 다른 이에게 넘겨 준 이유로 이때 선한목자교회(유기성 목사)로부터 적지 않은 건축비(1억 5천만원)를 후원받을 수 있었다. 조 목사는 그것이 ‘적립해 놓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했다. 개척하고 1년 동안 비전교회 생활을 거친 후 자립할 수 있었다. 그 속에는 ‘낙타무릎’으로 기도했던 조 목사의 ‘목숨 건’ 목회가 담겨 있었다. 그때 무리했던 ‘무릎꿇기’ 때문에 연골이 다 닳아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골수술을 해야만 했다.
개척을 준비하며 교회 이름은 ‘한마음교회’로 생각하고 땅을 찾았다. 그런데 마땅한 땅이 없었다. 현재의 자리만 나온 상태였다. 부동산업자가 비싸다는 이유로 소개도 하지 않은 땅이었다. 땅 주인은 부산에 거주하는 불교신자로 사업가인 남편이 선물한 땅이었다. 다른 사람이 평당 300만원을 불렀을때도 팔지 않았던 땅이었지만 더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조 목사에게 넘겨 줄 때 그 부인이 말하길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주려고 작정한 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땅의 주변에 한마음교회가 있었기에 교회 이름을 위해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나서 알고 지내던 백승철 목사에게 작명을 부탁했는데 뜬금없이 ‘선한목자교회’로 하라고 했고, 일주일 동안 기도한 후 유기성 목사의 동의를 받아 '선한목자교회'로 결정했다. 성남 선한목자교회 임직자들 모두가 기공예배에 참석해 개척을 축하했다. 뿐만 아니라 선한목자교회가 첫번째 형제교회로 인정해 주었다.
조 목사의 설명을 듣던 이기우 회장이 순천에서 21년 목회하면서 중점으로 두는 것에 대해 물었다. 조 목사는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사역”, 곧 ‘드나베’라고 답했다. 연약하지만 2018년 인도네시아에 평신도 선교사로 김한태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한다. 김 선교사는 르비딤 생명수(정수기) 사역을 비롯해 대학에서 한국어 서당사역(성경읽기 및 필사)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교우들과 함께 6년에 1회 해외 선교여행 및 사역 후원을 해 오고 있다.
철저한 복음주의 사역의 일환으로 새신자 교육과 일대일 양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존 신자도 등록하면 필수로 받도록 지도한다. 그리고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신앙주소를 점검하고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자훈련에 집중하고 있다. 나아가 일일 영성운동 및 일기쓰기와 함께 주일예배에서 한 주간 받은 은혜를 간증하게 한다.
힘겹게 걸어 온 30여 년의 목회 여정에서 감사한 것은 자녀들이 ‘잘 되었다’는 것이라고 고백하는 조 목사의 눈에는 어느새 하얀 약체가 고였다. 종종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을 했다는 조 목사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자녀들이었다. 첫째 아들은 감신대를 졸업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둘째 아들은 한양대학교 음대 관현악과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국내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가 인정하는 실력자로 향후 길이 ‘열려’ 있다. 그 모든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힘겨운 중에도 ‘사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조 목사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실렸다.
호남특별연회 동문회장으로서 조 목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목회의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격려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그저 말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그런 점에서 ‘브릿지’(Bridge)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하기에 더 좋은 선배를 연결해 줌으로써 후배들에게 격려와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조 목사의 ‘후배사랑’ 방법이다.
차분하게 조 목사의 설명을 듣던 이기우 회장은 중간중간 질문하며 조 목사의 목회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특별히 선한목자교회 개척을 위해 7년 동안 목회하던 교회를 사임하고 20일 금식기도 한 것을 언급하며 무엇보다 기도를 앞세우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사명을 따라 굳은 의지로 목양의 길을 걷는 동문들이 자랑스럽다며 간절한 마음으로 축복하며 기도했다. 애절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목소리로 강과 약을 오가며 뜨겁게 기도하는 이 회장에 맞춰 회장단들도 간절함으로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식사 후에 다시 강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해남으로 향했다.
▣ 해남새롬교회(이호군 목사, 감신대 87학번)
해남으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물폭탄’을 헤쳐가는 험란한 여정이었다. 평소보다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차창 밖으로 금방이라도 범람할 것 같은 하천의 수위를 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남에 도착했다. 그런데 ‘깜짝쇼’가 회장단 일행을 맞았다. 순천에서 점심식사 후 헤어졌던 조대성 목사와 문영환 목사 부부가 먼저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부산에서부터 동행한 문 목사는 순천에서 헤어지기로 하고 인사까지 마쳤는데, 총동문회장의 여정에 당연히 연회장으로서 수행해야 한다며 조 목사와 함께 빗속을 가르고 해남으로 왔던 것이다.
이기우 회장과 일행은 문 목사와 조 목사의 마음에 감격하며 동문의 ‘끈끈함’을 느낀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해남새롬교회에 도착해 있던 동문들과 함께 예배실 안에 들어간 일행은 이호군 목사로부터 사역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새롬사회봉사단, 해남새롬 가정봉사원 파견센터, 꿈바라기 지역아동센터, ㈜콩세알 해남초록가게, 해남푸드뱅크, 새롬경로식당, 해남재능기부센터, 해남공고 스쿨 처치.. 해남새롬교회와 이호군 목사를 지칭하는 단어들이다.
인천이 고향인 이호군 목사가 해남으로 내려 온 것은 2004년이었다. 해남으로 이사하고 남은 박스를 정리할 때 지나가는 어르신이 “고물상에 갖다 주고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이지 왜 버리느냐”는 말을 했다. 즉시 박스를 모아 고물상에 갖다 주고 받은 5천원으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이 남았다. 그때 깨달은 것이 ‘없어서 사역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 깨달음을 계기로 이 목사 부부는 새벽예배가 끝나고 교회 봉고차로 해남 읍내를 돌며 폐지를 줍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20만원이 모아졌다. 가계를 위해 쓰기 보다 어떻게 이웃을 섬길까를 고민했다. 교회 안을 들여다 보니 음식 솜씨가 뛰어난 권사들이 보였다. 시야를 교회 밖으로 돌리니 불과 100m도 되지 않는 곳에 고목들이 가득한 서림공원이 보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노인들을 위한 토요무료급식이었다. 토요일에 한 이유가 분명하다. 평일에 무료급식을 하던 기관이 주말에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새롬교회가 토요일을 섬기기로 한 것이다. 그랬더니 성도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함께 폐지를 모아 교회에 쌓기 시작했다. 폐지를 모으는 노인들 중에는 은근슬쩍 교회 앞에다 자신이 모은 폐지를 두고 간다. 무료급식을 받는 분이 그렇게라도 도왔던 것이다.
어느 날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사무실 폐지 모아서 드릴께요."
폐지 모아 좋은 일 한다고 하니 곳곳에서 연락을 먼저 걸어왔다. 학기가 끝나면 문제집을 몽땅 바꿔야 하는 학원, 안 쓰는 이면지가 쌓여 가던 각종 읍내 단체 및 관공서, 여러 사무실에서 폐지를 모아 주었다. 조용한 읍내에 폐지 주우러 다니는 분들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지역에서 좋은 일 한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뜻을 모아 주었다.
그처럼 폐지를 모아 사용한 재정이 12년 동안 약 2억 원에 이른다. 그때 폐지를 주울 때 갈라진 손가락과 손톱 등의 상처들이 아직 낫지 않았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때 일을 설명하던 이 목사는 “단순히 폐지를 주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주운 것”이라고 했다. 앞선 노인의 경우를 들어 그렇다는 것이다. 폐지 주워 생긴 수익금으로 가계나 교회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무료급식 등 지역을 섬기는 일에 사용했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매년 11월 첫 주일에는 ‘사랑의 바자회’를 열었다. 바자회가 끝나고 남은 물품들을 정리하다가 재활용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는 기독교환경연대와 협력하여 초록가게를 하는 것이었다. 초록가게는 미국의 Green Store에서 힌트를 얻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아름다운가게를 했고, 박 시장으로부터 아이디어와 자료를 받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지금은 초록가게가 해남새롬교회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사역을 하나씩 하나씩 넓혀 갔고 언젠가부터 “과연 땅끝마을 해남에 있는 작은 교회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 목사는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무료급식을 하면서 직접 오지 못한 독거노인들을 위해 200개의 도시락까지 준비했다. 그런데 해남군에서 도시락반찬배달서비스를 시작하자 교회는 멈췄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작했고 남들이 하면 이내 멈추고 새로운 것을 찾아 시작하기를 반복해 왔다.
이 목사는 해남읍의 3만 명을 새롬교회 성도라고 생각한다. 주일에배에 출석하는 이들은 40~50명이지만, 해남읍민들이 모두 ‘익명의 교인’이라는 생각으로 만나고 소통하며 섬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목사는 교회가 "지역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부름에 응답하고, 영향력을 끼친다면 그 교회는 세계적인 교회”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일련의 이유로 해남에서 이 목사는 유명인사 곧 유지다. 지역사회 여러 단체에 임원이나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대두분이 그들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래된 예배당 옆에 조립식 건물로 세운 곳에서 어린이 공부방을 시작했다. 집에 가면 딱히 할 일이 없던 동네 아이들이 “교회 가면 사모님이 아이스크림 준다”는 것이 소문나자 매일같이 몰려 들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에서 숙제하는 걸 도와주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학원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친구들이었기에 교회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숙제도 하는’ 일석이조의 안성맞춤 장소였다.
그렇게 아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 중에 한 아이가 눈에 밟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친구들은 다 집에 가는데 혼자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았다. 이 목사 가족들의 저녁식탁에 함께 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집에 가 봤자. 아무도 없어요.” 아이의 말이 지금의 지역아동센터를 시작하게 했다. 지금도 학교 끝나면 20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책가방을 휙 던지고 공부방으로 뛰어 들어온다.
교회가 만나는 마을 아이들, 어르신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기발한 이벤트도 종종 개최한다. ‘독거노인 생신 잔치’가 좋은 예다. 공부방 아이들을 데리고 독거노인의 집에 찾아 간다. 생신 축하잔치를 벌이기 위해서다. 자식들도 찾지 않는 생일, 손녀뻘 되는 마을 아이들이 찾아와서 축하 노래를 불러 주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에 금새라도 떨어질듯한 함박꽃 같은 미소가 풍성해진다.
이 목사는 코로나가 발생하기 직전에 ‘해남 재능기부 센터’를 만들어서 해남읍민 누구나 본인의 재능 및 재산을 이웃들과 나눌 수 있도록 플랫폼 역할을 시작했다. 해남 유스호스텔은 청소년 모임 장소로, 해남 명창은 할머니들을 위한 재능 기부 공연으로 이 목사의 뜻에 함께 했다. 다양한 재능들이 교회로 모여서 이웃들에게 전해졌다. 이 모든 활동을 코로나가 멈추어 버려 너무나도 아쉽다며 안타까워했다.
작은 교회라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을 사역을 힘 있고 줄기차게 실천하고 있는 땅끝마을 작은 교회, 해남새롬교회. 흔히 해남을 땅끝마을이라고 하는데, 해남새롬교회 교인들은 해남을 ‘땅이 시작되는 마을’이라고 부른다. 해남이 땅끝마을이 아니고 땅이 시작되는 마을이듯 해남새롬교회도 이 땅에 교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작점으로 쓰임받고 있다면 과언일까?
이 목사가 또 하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회의 지도자층에 있는 분들이 새롬교회를 찾는 것이다. 감독이나 감신대 총장을 지내신 분들이 자주 찾아 왔다. 그렇게 지도층들이 다녀가면 교우들의 자존감이 올라간다(up)고 했다.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찾지 않던 국회의원 후보자들이 지금은 스스로 찾아와 예배에도 함께 한다. 각종 행사에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들도 찾아 올만큼 교회의 위상이 달라졌다. 그런 면에서 총동문회장과 회장단의 방문이 교우들에게도 큰 힘과 격려가 된다고 했다.
해남까지 동행한 조대성 목사는 격려의 말을 통해 “평소 아끼고 주목하는 자랑스러운 후배인 이 목사가 연회 동문회 총무로서의 역할도 잘 해 주고 있다”며 후배들에게도 좋은 선배상을 세워가고 있다는 말로 격려하고 축복했다. 이어 총동문회를 향해 호남특별연회의 경우 동문들이 위로와 격려의 모임을 가지려고 해도 쉽지 않은 환경이라며 총동문회가 나서서 어려운 교회 동문들을 불러 격려하고 위로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 목사와 조 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이기우 회장은 찾아가는 심방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동문들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어 행복했다”면서 곳곳에 자랑스런 동문들이 많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총평했다. 이어 “개인의 역량과 환경은 다르지만 그 지역과 때에 맞는 목양을 하도록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그 깨달음의 힘에서 나온 탓인지 마지막 마무리 기도에 힘이 넘쳐났고 이 목사의 세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호남특별연회의 모든 동문들을 위해서도 축복하며 기도했다. 해남에서도 이기우 회장의 ‘눈물의 기도’는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틀 일정의 남부지역 심방길을 마친 이기우 회장은 마지막으로 코로나 이후 달라진 환경에서 더욱 더 빛나는 목양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감리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복음전도와 함께 지역을 섬기는 것인데, 이러한 웨슬리의 전통을 살려 지역마다 선도해 나가는 동문들이 되기를 기대하며 총동문회의 역할을 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고 참석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이기우 회장의 ‘찾아가는 심방’은 새로운 ‘브랜드’로 자리매김 했다. 최범선 총무는 지방 감리사의 역할 때문에 이번 심방길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대전.충남권과 강원.충북권을 향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목양의 본을 세워가는’ 동문들에게로 찾아가 격려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며 동문들을 향해 이기우 회장과 총동문회의 활동에 더욱 관심을 가져 줄 것과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출처 : 웨슬리안타임즈(http://www.kmc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