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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학기 종강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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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04 1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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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학기 종강설교
본문: 히브리서 10:32-39
제목: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서라!
인천 내리교회의 2대 목사이며 감신의 전신인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던 조원시, 조지 히버 존스 선교사의 유고작인 “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한국교회의 발흥/일어남)가 [한국교회형성사]라는 이름으로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존스 선교사는 여러 교회를 개척 부흥시킨 업적이외도 [신학월보]라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신학잡지를 창간했습니다. 더나아가 1897년에는 엡워스 청년회를 조직하여 기독 청년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 될 이승만을 비롯하여 박용만, 전덕기 등의 청년 지도자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신학월보] 1903년 5월호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것은 평양의 남산재/남산현 교회 청년회에서 4백여명이 모였는데 특별히 부인들이 글을 짓게 한 일로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실게 된 것입니다. 즉흥시를 짓는데 제목은 화덕이고 운은 게네세로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남산재 교회의 담임목사인 노블 선교사의 부인인 미세스 매티 노블 여사가 지어준 새 이름으로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들이 연작시를 지었던 것입니다.
강ㅅ지메블
저기 노흔 쇠통 보게/ 치운 사람 덥게 하니/ 엄동설한 요긴하네 생각겉대 화덕일세
임씨통달
식은 지체 되지 말게/ 네가 참말 화덕이냐/ 항상 사람 덥게 하네/ 덥게 하니 화덕일세
진씨심적
찬 화덕에 불씨 두게/ 우리 마암 차고 차나/ 석탄 불로 덥게 하네/ 성신 불로 덥게하세
김씨 ㅅ도라
맘이 잔자 이리 오게/ 예수 천하 화덕되니/ 천국 화덕 여긔 잇네/ 온화하고 더움일세
제가 수십 년에 넘게 신학을 연구하고 글을 써왔지만, 이 연작시처럼 탁월한 신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글을 읽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과연 어떻게 천대받고 배우지 못하여 예수님 믿고 성경을 읽으려 한글을 배워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이 여성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존귀한 인격을 긍정하게 되었는지요! 흔하디 흔한 그리고 보잘것없고 지저분한 쇠똥 속에서 화덕을, 성령의 불을,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여성들의 일상의 삶이 쇠똥을 가지고 사는 삶이었고, 자신들이 그러한 천한 신분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쇠똥이 귀한 에너지원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귀한 자녀의 신분을 회복한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이 아니었을까요?
11월 12일 감신대 웨슬리 채플에서 열렸던 제29회 양주삼 학술강연회에서 베이징 대학교 장쯔강 교수가 지적한 중국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차이점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 기독교는 서양 선교사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낙인 찍혔던 것과 달리, 한국 기독교는 3.1 운동에서 보듯이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민족 영웅이었습니다. 장교수는 감신에 있는 감신 출신 3.1 운동 민족 대표 7인상 앞에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면서 사진촬영을 했습니다. 장교수에 의하면 두 교회간의 차이는 “기독교의 정경과 교리와 신학 자체에 있지 않고, 서양 선교사와 해당 국가 기독인들의 사회적 실천의 결과에 있다. 기독교가 들어가서 그 민족이나 나라의 발전에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도움과 영향을 주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소극적이며 심지어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의 차이이다.”
오늘 본문이 히브리서 10장 32-39절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32절에서 35절은 히브리서를 수신한 초대교회의 위대한 모습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6절에서 39절은 현재 위기를 직면한 교회를 향해 강력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대체로 모든 교회의 역사에서 초기의 처음 교회들과 교인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이 있은 다음에는 믿음이 식어지거나 심지어 교회가 타락하게(침륜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 10:32절에서 “전 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의 맥락이 아마도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33절에서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거나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던 극심한 박해를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의 교우들은 이럴 때일 수록 위축되지 않고 본문 33하반절과 34절을 보니까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환란과 박해를 받는 교우들을 위해서 변호하고 그들을 돌아보는 행위로 인해 로마 시민이 향유해야 할 재산권마저 박탈당했으면서도 도리어 기뻐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참으로 놀라고 경이스럽기 까지 합니다. 어떻게 그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히브리서는 전체 신학적 방향이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담당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한다는 종말론적인 약속의 말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소유권을 박탈당해도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고” 담대하게 큰 상을 기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히 10:35)
본문의 두 번 째 부분인 36에서 3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 유명한 하박국서 2:4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36절 곧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는 말씀은 35절의 연장 선상에서 과거 신앙의 선조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현재 위기를 직면한 교우들에게 미래의 약속을 가리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37절에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면서 38절에선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전체 구조에서 보면, 10:36-39절은 히브리서 11장과 12장 13절까지의 말씀을 예견하고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학자인 토마스 롱 교수는 그의 주석에서 히브리서 11장을 믿는 자들의 명예의 전당에 관한 말씀이라고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히12:1a)이 11장에는 열거되어 있습니다.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을 거쳐서, 모세와 기생 라합은 물론이고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수ㅤㅂㅏㄶ은 선지자들이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입니다. 히11:38은 이러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토록 혹독한 박해와 죽임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믿음의 지조를 지킨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명예의 전당에는 아직 빈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지금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히12:1-2a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 믿음의 경주장에서 우리는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마치 우리를 응원하는 군중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우리가 담대함과 인내로써, 곧 믿음으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본문 38을 다시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이 이러합니다. 39절에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 이전 번역에는 “뒤로 물러가 침륜할 자”(물에 빠져 망할 자)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침륜 상태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온갖 재정비리, 도덕적 타락은 물론이고 교권 다툼과 선거 비리로 썩을 대로 썩어 있습니다. 히10:31대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은 분명히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과연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까? 이제 우리 앞에는 두가지 길만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담대함과 인내로써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달릴 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가 멸망할 것인가?입니다.
주님이 이 시간 말씀하십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제일 처음 들었던 하박국 선지자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 유배당하고 죽임당하던 시대, 그 시대의 파수꾼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절규하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하는 지식이 세상을 덮을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니 온 세상이 잠잠해야 함을 선포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서를 비롯하여 구약성경 전체에 있어서 가장 존귀한 하나님의 이름 중의 하나가 ‘엘 에무나’(el emunah) 곧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하박국 2:4는 바로 인간의 믿음이 엘 에무나, 미쁘신 하나님에게 근거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말씀을 인용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는 죄의 상태에 있기에, 하나님의 미쁘심, 곧 당신의 외아들을 주시기 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믿는 길만이 남았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미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증거가 어디 바울 사도에게서만 끝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16세기 개혁자 루터에게도, 그리고 20세기 신학자 바르트에게서도 다시 출현했던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저버리고 교권을 우상화했을 때 루터는 오직 미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능력으로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후 유럽에서 나찌즘이 등장하고 절대화된 국가권력이 선전 선동을 통해 세상을 미혹하던 때에, 신학자 바르트는 그의 유명한 [로마서 강해]를 통해 죄의 심각성에 경종을 울리며 미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심판을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믿음에의 초대는 우리 시대에도, 우리에게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성령님의 부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년 전에 존즈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일어남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백년 후 지금의 한국교회는 어떠합니까?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 멸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해야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까?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확신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내내 증언하는 미쁘신 하나님에 대한 전적으로 담대한 신뢰로서의 믿음입니다. 참으로 한국교회의 안팎에는 악한 마귀의 온갖 유혹과 공격이 수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물러서면 안 됩니다. 우리 앞에 놓인 믿음의 경주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담대함과 인내로써 수행해야 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주 믿는 사람 일어나 다 힘을 합하여/ 이 세상 모든 마귀를 다 쳐서 멸하세
저 앞에 오는 적군을 다 싸워 이겨라/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357)아멘!
어찌해야 한국교회가, 감리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까? 지난 5년 여 동안 지켜보았지만, 위로부터의 개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감독이나 감독회장을 위시해서 교역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교회의 장 자리를 불의한 방법으로 서로 차지하려는 한 안됩니다.
한국 초대교회에 관한 여러 사진들 중에서 유독 제 눈을 끌었던 빛나는 두 컷의 사진이 있습니다. 보통 남자 선교사님들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찍은 사진은 백이면 백 모두 앞줄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남성 백인 선교사들이.
그런데 쇠똥에서 화덕을 보고, 성령 불을 보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보았던 조선의 기독 여성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들고 산넘고 물건넜던 그 전도 부인들을 감화시켰던 미세스 메티 노블 부인은 달랐습니다. 그녀가 전도 부인들과 찍은 사진에는 흰 한복을 입은 전도 부인들이 앞에 서 있고 노불 부인은 뒷 줄에 얼굴만 살짝 보입니다. 노블 부인의 수제자였던 전도 부인이 여학생들과 찍은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려면, 쇠똥처럼 낮은 자리에서부터, 아래로부터, 건축자가 버린 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증언의 절정에서 이렇게 소리쳐 외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2-13)
여러분, 이번 겨울 방학 중에 여러분도 이 춥고 아픈 세상에서 굴러다니는 이 시대의 쇠똥과 같은 존재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서라!
감신이여, 다시 일어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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