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12학년도 2학기 종강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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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등록일
- 2012-11-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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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 4:12-17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5/사9:1-2)
제목: 감신이여, 저 낮은 곳으로!
I.
어둠과 죽음의 땅에 빛과 생명으로 오셨고, 그리고 속히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길 빕니다.
사랑하는 감신인 여러분, 2012년 가을 학기가 벌써 다 지나고 오늘 우리는 종강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이번 학기를 무탈하게 잘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가르치시고 연구하시느라고 애많이 쓰신 교수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젊음을 불태우며 신앙과 지성의 연마에 최선을 다한 학생들에게 격려를 보냅니다. 나아가 보이지 않게 교수님들과 학생 여러분을 도우며 묵묵히 섬겨 준 직원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주는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로서 왕국주일이기도 합니다. 왕국주일은 성령강림절과 대강절 사이에 있는 주일인데, 보통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복음서들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첫 설교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는 말씀에
집중하느라고 그 말씀이 나오게 된 직접적인 배경과 컨텍스트에 대해선 관심을 덜 기울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 바로 직전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마 4: 12-16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설교가 다 그렇듯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분명한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메시지가 없는 상황은 공허하고, 상황과 관련이 없는 메시지는 맹목적입니다.
본문을 구조적으로 보면 마 4:12-16은 마 4:17의 상황이며, 마 4:17은 마 4:12-16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과연 어떠한 맥락에서
선포된 것입니까? 본문 12-13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 4:12-13).
예수님은 고향인 갈릴리로부터 유대 광야를 흐르는 요단강에 가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다시 유대 광야에서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나신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본문은 말해 줍니다. 그리고나서 본문 14는 이러한 예수님의 이주 행위를 가리켜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면서 이사야서 9:1-2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5-16)
마태복음의 본문상으로는 이사야서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알기 어렵습니다. 이사야 본문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 그리고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전에 고통을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사9:1)
그렇다면 이사야 선지자는 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고통을 받던 자들 또는 멸시를 당한 땅이라고 불렀습니까? 그것은 북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왕하15:29에 보면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 지역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던 처음 장소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서의 본문은 이 치욕과 고통의 역사의 현장,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옛 땅을, 이방인들과의 혼합을 통해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게 된 그 원한의 역사 현장을 큰 빛으로 비추시고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추도다.”(사 9:2)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흑암에 행하던 백성에게로, 사망의 그늘진 땅으로 가셨을 뿐 아니라, 그 낮은 곳에서 사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 선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맨 처음 포로로 끌려갔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낮은 땅에 있는 자들과 동거하시면서, 바로 그 낮은 곳으로부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곧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능력을 증거하기 위하여 사역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감신인 여러분, 이번 주 종강을 하고 다음 주가 지나면 방학이 시작됩니다. 방학(放學)이란 공부하는 데서부터 잠시 놓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하지 않고 그저 쉬고 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방학이라는 말에서 받침 하나를 빼어내고 ‘방하’(放下)라고 읽고 싶습니다. ‘방하’라는 한자어는 ‘내려 놓는다’ 또는 ‘내려 간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선불교 전통에 의하면, 방하 또는 방하착이란 아주 유명한 화두입니다. 그것은 석가모니에게 그의 한 추종자가 꽃을 공양했는데 그 공양했다는 집착된 마음마저 내려놓으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선불교의 대가 조주는 제자들에게 방하착이라는 공안을 제시하면서, 모순적 취사선택의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거나 양쪽 모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놓아버리고 분별적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습니다.
‘내려놓음’이라는 말은 요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많이 입에 오르내립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죠. 그이후 그는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또 썼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하거나, 자기의 이익을 주님을 위해 포기할 때 그것은 내려놓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다시 자기의가 되고 교만의 씨앗이 되면 더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 때부터 ‘하방’ 곧 방하라는 말을 거꾸로 쓰면서 이른바 하방운동을 펼쳤습니다. 하방운동이란 공산당원 및 국가공무원들을 벽지 농촌이나 공장에 보내 노동에 실제로 종사시키는 일입니다. 또 도시의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을 변경 지방에 정착시킴으로써 정신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간의 거리감을 없애고, 낙후된 농촌 산간 지역을 근대화시키려는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올 해에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선출된 시진핑 총서기도 하방생활을 혹독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통과해서 큰 인물이 된 사람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진영의 지도자들이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중앙에서 지방으로 하방하는 생활정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하라고 하든 하방이라고 하든, 오늘 우리 감신대에게 도전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우리도 머리로만 하는 학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저 낮은 곳으로 가서 섬기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 방학이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감신인들이여, 저 낮은 곳으로 방하하라, 하방하라!
II. 1.
2012년 올 해 9월 5일에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중앙위원회를 통해 만장일치로 새로운 선교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서는 내년 2013년 대한민국 부산에서 개최되는 제10차 WCC총회에 제출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선교문서는 앞으로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선교와 전도의 방향에 중요한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이 문서의 제목은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 지형 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입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선교는 모든 생명의 창조자, 구속자, 양육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와 피조물에게 넘쳐흐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쁘신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만이 아니라, 온 생명, 온 세상(oikoumene)을 하나님의 생명의 그물망 안에서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마음 또는 하나님 심정의 장이 이 우주 안에 형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으로부터 선교가 시작된다는 이 문서를 처음 접하고 깊이 공감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올 해 [하나님 심정의 신학]이라는 저술을 통해 하나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선교로 교회가 돌아가고, 그러한 교회를 위해 신학교육이 이뤄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신학적, 목회적 과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고난과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에 자기의 삶을 내맡깁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가 지난 4, 5년간 중국에 대해 공부하면서 만났던 감동적인 서사시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호가 십팔박”이라고 불리는 이 서사시는 지금부터 1800여년 전에 한나라 말기에 살았던 절세미인이며 인생유전을 노래한 최고의 서사시인 채문희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채문희는 원래 한나라의 귀족의 딸로서 유복한 생활을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가 정치적 모함으로 몰락한 후 결혼에도 실패합니다. 그 후 한나라가 기울자 서쪽에서 흉노족이 쳐들어와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녀의 출중한 미모와 격조 높은 교양은 흉노족의 임금마저 반하게 해서 두 사람은 혼인하게 되고, 두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됩니다. 그러나 푸른 산과 비옥한 땅에서 맛나는 음식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살던 채문희는 황량한 광야에서 냄새나는 양고기와 말젖을 먹고 거친 가죽옷을 입고 사는 삶을 견디기 어려워 고향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의 12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채문희의 부친의 제자이자 중원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에 불타는 조조가 채문희를 고향으로 데려오기 위해 천만금을 사신과 함께 보냅니다.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건만, 이번에는 두 자식들과의 생이별을 해야 하는 그녀는 또다른 모진 시련에 절규합니다. 호가 18박 중에서 1박과 7박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 태어날 적엔 별일이 없었더니
나 태어난 후 한 나라가 쇠하였네
하늘의 불인함이여, 난리를 내리시더니
땅의 불인함이여, 나로 하여금 이런 때를 만나게 하였네”(1박)
“하늘에 눈이 있다면 어찌 내가 홀로 표류함을 못보시나이까?
신에게 신령함이 있다면 어찌 나를 바다 같은 천남북두에 두시나이까?
하늘을 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하늘은 내게 시련을 주나이까?
신을 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신은 이 황량한 곳에서 죽이려 하나이까?”(7박)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렇게 하나님이 무심하시고 비정하시다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무심하십니까? 비정하십니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에브라임을 향해 이렇게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합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0)
같은 맥락에서 호세아 선지자도 하나님의 심판과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하려는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 심정을 이렇게 대변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호세아와 예레미야의 영맥을 이어 받아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포로시대가 끝이 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죄인들을 회개에로 초청하시면서 미쁘신 사랑의 하나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눅 15:20)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시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 찬가를 인용하면서, 예수님 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스스로를 낮고 천한 자리에로 비우셨음을 찬양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II. 2.
세계교회협의회의 새로운 선교 문서의 중대한 공헌이며 도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변화하는 기독교 지형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의 관점 변화 내지 파라다임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선교역사는 서구 기독교의 중심으로부터 미전도 지역으로의 지리적 확장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의 지형이 재형성되면서, 강력한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출현함으로 기독교의 무게중심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선교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사회특권층에서 소외계층으로 이동하는 운동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부의 사람들이 선교의 주체들로 자신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선교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변혁으로 확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부를 향한 선교’에서 ‘주변부로부터의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s)로 선교 개념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힘있는 자가 약한 자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특권있는 자가 소외된 자에게 선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대하는 대안적인 선교운동이 필요합니다. 주변부에 사는 것은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합니다. 특권층 사람들은 주변 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투쟁에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의 갈릴리로 내려 가셔서 납달리와 스불론의 옛땅에 속한 가버나움에서 사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셔서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교의 주요 동역자들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과 동거하심으로 주변화되고, 억압당하고, 고난 받는 사람들이 무엇이 자신들에게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자신들의 위험해진 삶에 나쁜 소식인지를 구별하는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살림의 선교에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려면 우리는 생명을 긍정하는 것과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저 낮은 곳, 주변부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선포가 중요하지만 그저 말이 앞서는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심정을 품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동거하며 그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경청의 선교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부, 저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향해 선교의 방향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정의, 연대, 평화는 주변부로부터의 선교의 중요한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III.
사랑하는 감신인 여러분, 내년에 세계교회들은 우리나라에 모여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로 우리를 인도하소서”라는 주제로 성회를 열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감신대는 이러한 시대적 부름에 담긴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과연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심정을 품고 역사의 그늘진 저 낮은 곳으로, 저 주변부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지난 주일 저녁에 저는 천안의 갈릴리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증언했습니다. 그날 저녁엔 월요일 새벽에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 지대에로 선교 방문을 위해 출발하는 분들을 위해 기도와 격려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미얀마에 의해 탄압받고 중국에 의해 거부당한 카친 족 난민 13여만 명이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원래 지난 주에 그곳으로 출발하려 했는데,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미얀마 공식 방문으로 연기되었다며, 갈릴리 교회 이창준 목사님이 이는 세례 요한처럼 미 대통령이 길을 깔아주고 한국교회 선교팀이 들어가게 된 것이라고 재치있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과거 중국의 변방이었고, 근현대엔 미국과 서구문명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두 변방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새로운 중심(new core)으로 삼으시고 한국교회를 세계선교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하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 선교를 위해 우리 시대 변방으로, 저 낮은 곳으로 가야 할 텐데, 오늘 여러분에게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에게 저 해변 길 이방의 갈릴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번 방학을 기해, 그곳, 저 낮은 곳에 대해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심정이 울고 계신 저 어두운 땅을 향해 여러분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합니다.
이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감신이여, 저 낮은 곳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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