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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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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문

2013년1학기 종강예배설교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6-05 00:00:00
조회수
13320
첨부파일
 

제목: 복음의 비밀

본문: 6: 10-20

우리는 오늘 2013학년도의 꼭 절반이 되는 봄학기를 마치며 그동안 우리가 땀흘려 일구어 왔던 경건과 학문 그리고 실천의 열매를 중간 점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여러 가지 학내외 안팎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사 일정이 잘 진행된 것에 대해서 교수님들과 직원들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의 수고와 노고를 치하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구원의 드라마의 현장에서 다시한번 복음의 비밀을 굳게 붙잡고 담대하게 선포해야 할 우리의 사명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에베소서는 불과 6장으로 되어 있으나, 그 스케일과 깊이에 있어서는 성경의 다른 어떤 부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난 521일부터 23일 까지 생활관 새벽기도회에서 저는 에베소서를 가지고 강해설교를 했고, 바로 지난 주 화요일 528일에 합창단 주관 예배 때도 에베소서를 본문으로 설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 설교를 연속으로 들은 분들에게는 오늘의 말씀이 화룡점정’, 곧 용을 다 그리고 나서 최종적으로 용의 눈에 점을 찍는 것 같이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 대부분을 위해서 다시한번 저는 제가 본 에베소서의 구조와 핵심 사상을 간단 명료하게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국 성공회의 감독이며 저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는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라는 책에서 오늘의 교회는 스스로를 에베소 교회와 같은 초대교회의 직접적 계승자로 인식해야 하며, 에베소 교회에게 한 말씀을 마치 우리에게 직접 한 것처럼 여기며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 시대와 신약 성경의 시대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차이가 있고 엄청난 문화적 변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전체의 드라마 상으로는 에베소 교회와 우리는 드라마의 마지막 막에 해당하며, 에베소서는 다른 신약 성경과 함께 마지막 막을 여는 첫 째 장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서의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시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의 남은 장에서 다양한 즉흥 연기들의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드라마를 대체로 ‘5막 모델’(five-act model)로 봅니다. 1막은 창조, 2막은 타락, 3막은 이스라엘, 4막은 예수 그리스도, 5막은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는 다섯 째 막, 즉 교회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다섯 째 막은 부활절과 오순절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이 막의 첫 째 장이 사도들의 시대인데 바로 그 헌장으로 채택된 문서가 신약성경입니다. 성경의 드라마에 있어서 우리 시대와 그 이전 구약 시대 사이에 발생했던 두 번의 커다란 막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제3막 이스라엘에서 제4막 예수님으로 전환 한 것이며, 다른 한 번은 제4막 예수님에서 제5막 교회로 전환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 또한 우리의 이야기의 토대로 선포하는 데 온전히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성경의 5막 드라마가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에베소서가 성경의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 심중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 2-5)

창세 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예정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의 플롯, 곧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시는 뜻의 비밀이십니다.(1:9) 이것은 구원 드라마의 시간적 차원에서 바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엡 1: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 드라마의 공간적 차원, 곧 드라마의 우주적 무대 위에서 예수님은 어떠한 존재이십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에베소서는 특유의 교회론을 동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시하여 지상의 모든 교회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로 보며 예수님이 교회라는 하나님의 집의 모퉁잇돌혹은 머릿돌이라고 선포합니다.(2:20) 시편 118:22부터 예수님 자신의 말씀(12:10)은 물론이고 사도행전(4:11)과 베드로전서의 말씀(벧전2:4-8)에 이르기 까지 일관된 핵심 사상은 이스라엘과 세상 사람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이 비밀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오는 데, 특히 엡1에 한 번, 3에 세 번, 그리고 엡6에 한 번 나옵니다. 3장에 의하면 교회의 사명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의 지혜를 세상의 권세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3:10)

오늘 본문은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는 직임이 마귀를 대적하며,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상대하여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6:11-12) 여기서 마귀의 권세들은 고대인들의 종교적인 환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구조들과 제도들 그리고 체제들의 내면성으로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제도들의 내적 그리고 외적 표현입니다.(월터 윙크) 성경에 나타난 권세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윙크가 말합니다. “기독교인든 아니든, 우리 사회는 뭔가에 홀려 있다(무슨 영에 사로잡혀 있다). 즉 우리는 폭력, 섹스, , 그리고 마약에 홀려 사로잡혀 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악마와 그의 일’(즉 지배체제)을 버리기로 약속하는데 세례가 유효하였듯이, 지금도 뭔가 유효한 집단적으로 귀신쫓는(exorcism) 형식들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데살로니가 후서 2:7에 근거하여 불법의 비밀이라는 설교를 통해 복음의 비밀에 맞서는 마귀의 세력이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 까지 쉬임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해 왔다고 역설했습니다. 웨슬리의 설교의 놀라운 통찰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비밀을 바로 알고 그것을 바로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불법의 비밀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12년 제69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여받음으로 대한민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3대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거머쥐었던 <피에타>는 바로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불법의 비밀을 폭로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한 젊은이의 복수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마도 돈 때문에 버림받은 수금업자 강도는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며 자신이 당한 세상에게 복수를 수행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강도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한 젊은이의 엄마가 찾아옵니다. 역시 돈 때문에 빚어진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갑자기 엄마 행세를 하는 여인을 강도는 우여곡절 끝에 받아들입니다. 엄마와 강도의 대화 속에서 돈이 무언지를 묻자 복수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과와 복수의 연쇄, 모든 것의 시작과 끝. 돈의 현현. ... 마치 돈이 만들어 낸 죽음과 복수의 컨베이어 벨트.” “엄마는 복수를 위해 강도에게 접근했지만, 진범이 강도가 아닌 돈이란 것을 알게 된다. ... 돈은 그렇게 모든 시작과 끝을 추동한다.”(윤광은) 강도에게 복수하려는 엄마 미선은 도리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땜에 죽은 아들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문화 해독가 윤광은은 이 영화의 엔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강도는 사슬에 매달린 채 트럭에 끌려간다. 틀림없이 강도는 십자가처럼 열십자로 누웠을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읽으면, 강도가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강도 자체가 십자가가 된다. , 강도가 끌려가는 것이 아닌, 채무자 아내의 트럭이 십자가를 끌고 가는 것이다. 이렇듯, 돈의 세계에서 지상의 모든 삶은 저 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해석을 읽으며 문득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섰던 두 강도의 십자가가 생각났습니다.(15:27) 물론 저들의 십자가는 복음의 비밀을 함축한 구원의 십자가가 아니며, 도리어 불법의 비밀에 사로잡힌 파멸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법의 비밀을 파하고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자들이 되겠습니까? 본문 10-17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신갑주, 비폭력의 갑옷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감옥에서 사슬에 매인 사신”(6:20)으로 자신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두고 지키고 있는 중무장한 로마 병정을 단순히 모방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비폭력의 능력인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 의지하여 바울은 어둠의 권세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비밀이며,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이 여기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폭력의 실패를 표시한다.”(윙크)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4-15)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임은 권세들이 쓰는 마지막 처벌이나, 십자가는 죽임의 무력함을 폭로했습니다. 이 골로새서의 말씀을 다시한번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요? 이 세상 권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서도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라고 하지 않나요? 그런데 골로새서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프랑스의 프로이디안 사상가 라깡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도리어 우리를 응시하는(gaze)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권세를 응시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다시말해서 이 세상의 시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수치와 조롱의 눈길로 바라보았다면, 정작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러한 세상을, 세상의 권세를 무력화하는 눈총으로 되쏘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 권세와 통치자들은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폭력의 시각은 십자가가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응시로 말미암아 무력화되고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폭력에 의한 공포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가 사랑과 화해의 심벌이 된 것입니다.

그는(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4,1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좌우의 두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을 위해서도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던 화해와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화 <피에타>의 강도, 불법의 비밀의 하수인이며 희생자인 그를 위해서도 구원이요 소망이 되는 복음의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지난 달 515-17일에 미국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열렸던 “2013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인 대회‘(Ecumenical Korea Peace Conference)에서 발표된 기도와 호소의 내용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 악마처럼 여기며 분노와 적의를 품고 살고 있습니다. ... 우리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일치를 이루기 보다는 분단의 장벽을 높이 쌓고 안주하며 살았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 ‘우리의 화평이신예수 그리스도께서 남한 북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2:14) 허무신 것처럼 남한과 북한 사이에 쌓인 불신과 증오, 통일에 대한 무관심의 장벽을 허무시어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 평화와 공존을 향한 비전을 품고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날아 오르게 하옵소서.(40:31)”

이제 우리는 이번 학기를 마치고 기나긴 여름 방학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불법의 비밀에 사로잡혀 신음하는 동포들과 이웃들을 바라보고 저들을 구원하고 해방하겠다는 열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시하여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복음전도의 열정에 휩싸이게 한 것은 교인수를 늘리고자 하는 욕망도 아니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천상의 도피처로 안내하겠다는 바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들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로부터 놓여남에 대한 안도감과, 또 남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겠다는 결의에 불타서 이뤄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리고 특별히 사슬에 매인 사신이었던 사도 바울처럼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는 자들이 다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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