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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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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석모 교수님 장례예배 설교말씀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6-05 00:00:00
조회수
16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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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석모 교수님 장례예배 설교말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 박종천 총장님

저는 오늘 이와 같은 자리가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고, 깊은 슬픔과 하나님 앞에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총장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는 사명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우리 유가족과 함께 아파하는 우리 모든 분들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요한복음 11장 그 전체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하면서 모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참된 복, 복된 삶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오늘 안박사님께서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페이스북에 당신의 아픔과 여러 가지 소회를 담으신 글들을 올리시면서, 수많은 댓글들이 올라오고, 그 글들 중에서, 바로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신, 그 말씀을 안박사님과 공감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증거 하고자 합니다.

지난 12월 중순 경부터 쓰여져 있는 이 글에 보면은, 안박사님은 이 요한복음 11장 말씀이, 공감의 목회자로서, 공감의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박사님의 말씀에 공감자는 상대의 아픔과 슬픔을 대신 언어로 표현하여, 그것을 함께 나누어 짊어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인츠 코헛이라고 하는 프로이디안 정신분석학자에 의하면, 공감이라고 하는 것은 대리적 혹은 대속적 내성(vicarious introspection)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신 안박사님은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암시 때문에, 바로 이것이 나를, 안박사님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묵상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몇 안되는 친구로 부른 사람이었고, 요즘말로는 예수님의 최측근이었습니다. 베다니 나사로의 집은 예루살렘 안가의 주인이 살고 있는, 주인의 여동생들이 함께 살고 있는 예수님의 안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절친도 죽을병에 걸릴 수 있다는 이러한 엄중한 현실 앞에서 안박사님은 자신과 나사로를 동일시하며, 또 이 시대에 나사로와 동일시될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며 말씀을 묵상하셨습니다. 안박사님의 목회상담센터, 소울프렌드 바로 그것은 상처 입은 아동, 청소년, 가족, 부부, 이 땅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상담과 치유의 장소였습니다.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소울프렌드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깐 이렇게 적혀있더라구요. “우리들의 소울 프렌드 안석모교수님께서 55일 주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참된 위로자, 인생의 동반자였던 고 안석모 교수님을 추모합니다.” Anam Chara, 켈트어로 영혼의 친구, 바로 안박사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냉천동산 감신대는 이 소울프렌드 상담실이 베다니 집이었다면, 예루살렘 성이었겠죠.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안박사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많은 것들을 회상하시면서 그 중에 학교에 대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감신에 이르기까지 글을 쓰시는데, 감신에 대해서는 많은 글을 남기지 못하셨습니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감신이 양가적이고, 다가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내 소견을 밝힐 수 없다.” 우리 감신으로 인하여, 기쁘셨고, 아프셨고, 슬프셨고, 감사하셨던 그 분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기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을 피해, 요단 동편 광야에서 사실은 하룻길이면 베다니에 들어오실 수 있음에도 이틀을 머무르시면서, 기어이 나사로의 죽음을 맞이하고, 죽어서 냄새나서 썩게 된 나사로를 남겨두시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은 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틀이나 머무셨을까?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고, 더 헤아려보려고 기도를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안박사님은 그 본문을 목회상담자로 비틀어서 생각하시면서, 예수님이 겪게 된 심리적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보시며,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교 마을이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의 손이 즉각 뻗치는 곳이므로 위험한 지대였다. 예수님은 인간이기에 당신의 안위를 걱정하시면서 주저하고 계셨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침내 결단하시고, 친구를 살리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러 당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죽음을 결정하시고 베다니로 향해 가셨다.” 그러면서 안박사님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베다니로 향하는 예수님의 발걸음에서 삶을 본다. 너를 위한 나의 존재유지로써의 삶을 본다.” 그리고 그 글에 이어서, 안박사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소회를 남기고 있습니다. “처음 암선고를 받고 바람에 흔들리는, 흔들리던 내 마음이 생사의 두려움에 흔들렸다. 그러나 항암이 시작되면서, 마음이 안정을 되찾고 일상생활이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문득 발견하였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흔들리던 때의 일상과 날마다 계속되던 평상시의 일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도대체 죽음이라는 것이 무에야, 아니 삶이라는 것이 무에야,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어떤 자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죽음이든 삶이든 하던 일을 하던 것밖에 없군, 그 하던 일이라는 것이 나의 미션을 이룩하는 것뿐이었다. 선생으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목사로, 아들로, 친구로 그리고 나 자신의 동반자로 살아가는 것일 뿐안박사님은 예수님의 이 결연한 베다니 행에서 예수님은 도피를 택하지 않으시고 죽음을 맞닥뜨리겠다고 용기를 가지셨던 것을 보시며 지극한 일상의 자리가 비상한 은혜의 자리임을 깨우치게 되셨습니다.

어제, 영안실에 가서 입관예배에 참여하기 전에 입관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도 그렇고, 그 이전 그 이후에도 여러 사모님들로 보이는 여성분들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마리아가 연상되었습니다. 사모상담과정에 오셔서 치유를 받으시고, 안박사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여러 이 땅의 마리아들이 흐느끼며 통곡하는 모습에 저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베다니 마을어귀에 여전히 서계신 예수님, 마르다는 맞이하러 나왔는데, 여전히 주저앉아 기력을 잃고 쓰러져있는 마리아를 마을어귀에서 예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실제적이고 적극적 행동주도형 인물인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과 오빠의 죽음에 대하여 신학적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이고, 소극적이고, 사고중심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는 말이 나올 수 없는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서 눈물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예수님도 그와 공감하면서 함께 우셨다고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박사님은 예수님을 공감능력을 가지신, 높은 EQ 감성지수를 가지신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시면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이렇게 공감하셨을 거라고 멘트를 하고 있어요. “마르다야,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심정에 있구나, 얼마나 슬프고 놀랍고 믿어지지 않느냐? 마르다야! 마리아야! 오라버니가 없는 세상이 믿어지지가 않겠구나? 친구인 나도 이렇게 슬프고 힘든데, 누이인 자네들이 얼마나 애통스럽고 고통스럽겠나?” 그런데 안박사님은 나사로의 비애라고 하는 참으로 탁월한 글속에서, 정작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사로를 위해서는 별다른 말씀이, 따스한 보살핌을 이야기하는 말씀이 제공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안타깝다고 밝히시면서, 자기 인생에서 주연역할을 하지 못하고 조연이나 엑스트라 역할을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비극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안박사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예리한 예언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삶의 비극이 있다.” 안박사님의 글입니다. “병원은 환자를 위해 있는데 정작 병원은 의사중심으로 움직인다. 학교는 학생이 최고의 초점으로 존재하는데, 선생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교회는 양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목자만 대접을 받는다. 나사로가 죽어서 그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는데, 하이라이트는 그 애도자들과 능력 많으신 예수님에게만 쏟아진다.” 우리가 깊이 경청하고 묵상하고 반성하고 회개해야할, 안박사님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삶에서 주연이 되도록 도와주는 생이 목자의 생이다.” 안박사님의 목회신학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안박사님 스스로 나사로와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이 땅의 수많은 나사로들이 자기 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어느 누군가의 생의 이야기에 조연이나 단역으로 스쳐지나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아파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시며, 스스로 병을 얻어 vicarious introspection 대속적이고 대리적인 공감의 목회를 하셨던 분, !!!

오늘 본문에 보니깐, 마리아는 마르다와 달리, 예수님을 만나서 뻗뻗히 서서 인사한 것이 아니라 그 발아래 엎드려 무릎을 꿇고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가 우는 것과 함께 온 모든 이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해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더라어제 아침 910, 삼성병원 영안실에 도착해서 보니깐, 제가 조금 늦게 도착해서 영안실에 사람이 없더라구요. 갑자기 이 말씀이 생각이 났어요. “그를 어디 두었느냐?” 부랴부랴 입관실에 내려갔습니다. 입관실로 올라갔습니다. 입관실에서 싸늘하게 식은 안목사님의 머리와 어깨를 터치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군요. 이아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감동으로 물으십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를 어디에 둘 것이냐?

최근 1-2년 동안, 안박사님이 보여준 비상한 목자의 삶이 있습니다. 안박사님은 발병하시자마자,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시면서 책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분량의 글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픈 중에 왜 그런 글을 쓰십니까?” 질문하니깐 한번은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라구요. “내가 마지막에 끝까지 심혈을 기울인 상담영성박사과정 학생들 이제 모집하고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데, 내가 병이 이렇게 났으니깐 내 마지막 봉사가 이것이다. 이 글을 읽고, 상담영성과정이 중요한 것을 깨닫고 우리 감신대가 발전했으면 좋겠다. 우리 후학들이 예수님을 닮은 목자의 삶을 살면 좋겠다.” 여러분 그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면, 수백 건이 아니라 수천 건의 댓글들이 달려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신역사의 전무한 안석모 현상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를 어디에 둘 것이냐? 발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몸으로 스스로 창단하신 교수합창단 아모르데이에 열심히 참여하시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게 반목하고 갈등하던 우리 교수단 안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게 하고, 화합으로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예수님을 너무 닮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안목사님!

그러므로 저는 오늘 이 시간 엄중하게 저를 포함해서 우리 교수단과 학교에게 묻습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그를 어디에 둘 것이냐? 특히 감신역사편찬위원장과 위원들에게 묻습니다. 감신역사에서 감신역사를 정리할 서기관들인 교수님들에게 묻습니다. 감신은 안석모 그를 어디에 둘 것이냐? 불행히 일찍 죽은 한 신학자의 죽음으로 정리할 것이냐? 아니면, 안석모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는! 우리의 미래인가?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진정한 신학의 의미인가? 우리 마음에, 우리 공동체의 삶에, 우리의 학문연구에, 목회현장에서 다시 살아나야하는 안석모! 그는 나사로가 아닌가? 우리의 영원한 소울프렌드가 아닌가? 그가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날 때, 하나님은 나사로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듯이, 하나님은 이 땅에서 안석모를 통하여, 그의 친구인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평화가 안박사님의 영혼과 유가족과 여기 모인 모든 친지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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