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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고난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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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3-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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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고난주일설교
본문: 고전 11:23-26
제목: 그 밤에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고전11:23)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주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절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자칫하면 종려주일의 환호와 부활절의 축하 사이에서 고난주간의 깊은 의미가 사라지기 쉽습니다. 물론 여러분들 가운데는 고난주간 동안에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금식을 하면서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난주간 동안에 이 땅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욱더 자기희생의 봉사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면서 분주하게 지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분별한 향락과 인륜을 저버린 퇴폐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남의 일로 보아 넘겨선 안될 일입니다.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유재헌 목사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 도덕적으로 도탄에 빠져 있던 민족을 바라보며 한국교회의 거룩한 제단을 수축하려는 열망으로 ‘한국의 제단’이라는 찬송을 지었습니다.
1. 우리에게 한 제단이 있으니 한국에 주신 제단이라
성도들아 전심전력 묶어서 번제의 제물로 바치자.
2. 영안으로 한국을 내다보라 마귀에 유린을 당하여
금수강산 무릉도원 변하여 죄악의 소굴이 되었다
3. 이 제단에 우리 몸을 바치어 동족의 죄를 책임지고
불철주야 눈물로써 빌며는 긍휼과 자비를 입는다.
(후렴) 피있고 불있다 연기기둥의 임재있다
이 강산에 피와 불을 던지는 한국의 제단을 받들자.
우리 시대에 한국교회가 수축해야 할 어린 양의 제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화하게 하시는 성령의 불과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연기기둥의 임재가 삼위일체를 이룹니다.(요엘2:30)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공로에 대한 말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 부흥운동의 시발점도 열광적인 성령의 은사와 치유 그리고 기적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는 사경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체험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미국의 젊은 의사 부부는 아프리카의 의료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미처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세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직전의 어느 날 밤 세 자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비탄 가운데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안전 문제만이 아니라, 미국의 보통 부모들이 보기에는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일, 곧 자녀교육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당신은 저희들에게 아이들 대신에 선교사의 삶을 선택하라 하십니까?”라고 그 밤에 절규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중대한 그리고 길이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고린도전서 11장 2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지금 첫 번 째 ‘성 목요일’(Maundy Thursday) 밤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의도하신 매우 중요한 구원사적 사건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유월절 만찬이 그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목요일 오후 일찍부터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미국의 부활의 교회 담임 목사인 아담 해밀턴은 [세상을 바꾼 24시간]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목요일의 행적을 이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목요일 정오 예수는 두 명의 제자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마을로 들어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조용히 유월절 만찬 또는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 오후 3시 경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날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대열에 참여하여 제사 때 쓸 양 한 마리를 이끌고 성전에 갔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편 찬송 소리와 함께 양의 목은 잘리고, 한 제사장은 양의 피를 그릇에 받아 그것을 제단 아래로 부었을 것이다. 그 후 베드로와 요한은 양고기를 가지고 다락방에 있는 부엌으로 돌아와 기름과 포도주로 양념을 한 후 서너 시간 정도 고기를 구웠을 것이다. 이윽고 저녁 7시 무렵 예수와 다른 제자들은 다락방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준비한 식사에 함께 참여했을 것이다.”(18-19)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은 보통 저녁 7시에서 시작해서 거의 자정이 다 되어 끝이 난다 합니다. 예수님은 식사후에 제자들과 감람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는 중에 유대 권력자들이 보낸 자들에 의해 잡히십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의 잡혀가심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도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번역에 대해서 이의를 달겠지만, 적어도 공관복음서의 기록으로 추론하건대 예수님은 자신을 유월절 어린 양으로 동일시 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14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게 하신 유월절의 유래가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각 가족마다 흠 없고 일 년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사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신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문설주에 그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이스라엘의 집은 ‘유월’ 곧 넘어가게 된 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은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과거 종의 신분에서 지금은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과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기쁨으로 가득한 축제와 축하의 시간을 의미한다.”(해밀턴, 24)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성찬을 나눠 줌으로써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으로 승화시켰다. 이스라엘은 동물의 피로 언약의 백성이 되었지만, 최후의 만찬은 예수의 피로 세워진 새로운 언약이다. 이전에 유월절 만찬이 이스라엘을 종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이야기라면, 새롭게 제정된 성만찬은 이제부터 모든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이야기다.”(29-30)라는 것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과 신학이 해석해 온 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러한 종래의 해석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의 의미를 좀 더 심오한 각도에서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고전 11:23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하면서 이미 복음서들이 기록되기도 전에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전승된 성만찬의 말씀을 알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의 말씀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로 영어 성경에는 (The Lord Jesus. on the night he was handed )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 원문상으로 잡히시던, handed over 또는 betrayed 로 번역된 것은 롬8:32의 ‘파라도켄’과 같이 넘겨진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 예수를 넘겨주시던 밤에”로 해석되는 것이 가장 타당한 번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체는 인간의 배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어주심의 사랑, 곧 구속의 은혜를 가져오는 하나님 자신의 행위인 것입니다. 리차드 헤이즈는 그의 [고린도 전서 주석]에서 사도 바울이 본문 23절에서 그리스어 동사 ‘파라디도미'(paradidomi, hand over)를 두 번 되풀이 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또는 ’넘겨준‘ (파레도카)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또는 ’넘겨지던‘ (파레디데토) 밤에 떡을 가지사”입니다. 헤이즈에 의하면 예수님이 배반 당한 사건의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 전승 안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으며, 대신 그는 일관성있게 예수님의 죽음을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행위로 해석하며, 동시에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보여 주신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333)
이제부터 우리는 고전 11:23을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 예수를 넘겨주시던 밤에”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 예수를 넘겨주시던 밤, 그 밤은 어떤 밤이었을까요? 성경에는 그 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 줄 또 다른 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그 밤에 아브라함에게 자기 목숨 보다 더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리아 산정의 아브라함과 이삭 부자를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산정의 사건이 있기 사흘 전날 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외아들을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시던 때를 생각해 봅시다. 바로 그 밤의 아브라함의 심정이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내어주시던 그 밤의 하나님 심정의 거울 이미지가 아니겠습니까?
구약학자이며 영성신학자인 엘렌 데이비스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모리아 산 사건을 다루면서, 한 유대인 판화가의 작품을 해설합니다. 아브라함의 왼 손은 아직도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외아들 이삭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칼을 쥐어 든 오른 손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등 뒤로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심정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어 줄 수 밖에 없는 아버지 심정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 심정이 익히 잘 아시고 심지어 그것을 몸소 체험하셨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과연 얼마나 달라질 것입니까?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던 밤에, 그 밤에 하나님은 굉장한 능력도, 엄청난 말씀도, 놀라운 기적도, 그리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조용히 내어 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신실한 순종으로 고난을 감내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신실하심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건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보여드릴 신실함은 우리가 행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참고 견디는가에 의해서도 측정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찌하여 당신은 저희들에게 아이들 대신에 선교사의 삶을 선택하라 하십니까?”라고 절규했던 여인은 그 밤에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Don’t you know that I love them even more than you do?” (내가 너 보다 네 자녀들을 더 사랑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여러분, 우리 감신 식구들 가운데 이렇게 어두운 밤, 그 밤을 겪어 온 학생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번 학기에 감신 공동체의 일원이 된 탈북 신학생들 중의 한 분 이야기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분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상에서 북한군들에 의해 붙잡혀 끌려갈 때, 그대로 돌아가면 자신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식구들마저 큰 변고를 치르게 될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을 불사하고 여러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습니다. 그의 몸의 척추가 부러지고 한 팔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압록강을 건너 북한군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리고 엉금엉금 기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쓰레기 더미를 통과하며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서 그렇게 그 밤에 수 십리를 기어가 한 교회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일생동안 찾아 헤매었던 참 사랑을 한 찬양을 수없이 듣고 또 들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겪었던 그 밤의 깊은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내 영 기뻐 노래합니다
이 소망의 언덕
기쁨의 땅에서
주께 사랑 드립니다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
이 소명의 언덕
거룩한 땅에서
주께 경배드립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
나는 말할 수 없네
내 영혼 즐거이 주 따르렵니다
주께 내 삶 드립니다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된 이후 유대교 신학자 베르코비츠는 출애굽의 승리를 노래한 미리암의 찬양,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를 다음과 같이 바꾸어 고백했습니다: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님은 모욕을 참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님 자신이 지으신 피조물에 의해 수치를 당하시고,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으시지만, 참으시고 또 견디십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은 하나님의 대적의 조롱을 감내하시는 데서 드러나며, 하나님의 긴 고난 가운데서 계시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힘을 포기하시는 데서 강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신비가들이 ‘영혼의 어두운 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하나님 심정의 어두운 밤’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넘겨 준 것은 내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주 예수를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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