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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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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봄학기 종강예배설교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6-03 15:05:06
조회수
11973
첨부파일

2014 봄학기 종강예배설교.hwp

제목: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

본문: 6:1-6; 12:1-2; 12:7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감신 공동체에 속한 학생, 교수, 직원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같이 하지는 못했으나 감신대를 위해 도우시는 이사, 동문, 학부모, 그리고 감리교회 교우들을 비롯한 후원자 여러분! 이번 학기는 과거 어느 학기 보다 우리나라와 민족의 삶에 커다란 충격과 상처를 목격하고 다함께 고통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물을 삼키며 우리의 사명의 자리에서 최선의 삶을 살려했다는 점에서 이 시간을 빌어 여러분 모두의 노고에 치하 드립니다.

이제 한 학기를 모두 마치고 학기말 시험으로 한 학기를 잘 마무리하면 여러분은 긴 여름 방학에 들어갑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물론 방학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학 동안에 여러분은 비록 학과목도 없고 학교에 올 필요도 없지만 도리어 신학이 지향하는 목회와 선교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방학을 맞이하여 자치하면 해이해 지기 쉬운 우리의 죄 된 본성을 경계하면서 우리 모두가 꼭 명심해야 할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오늘 본문 중의 하나인 호세아서와 관련하여 그 당시의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운명을 구약학자 존 브라이트는 [이스라엘 역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키를 매번 회전 시킬 때마다 이스라엘이라는 배는 점점 더 암초를 향해 나아갔다.” 제임스 림버그는 그의 호세아서 주석에서 이렇게 부연 설명합니다: “여로보암 2세 시기인 주전 786-746년 사이에 아모스는 여전히 고요한 바다를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는 국가를 상대하고 있다. 비록 예언자 자신이 경고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국가라는 배는 암초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호세아의 시기에는 암초와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의 메시지는 이미 가라앉기 시작한 배에 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풍전등화곧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위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원래는 반 앗수르 동맹에 시리아와 함께 남 왕국 유다를 끌어 들이려 했으나, 유다는 도리어 앗수르의 속국이 되는 길을 택하고 앗수르와 함께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는 바로 이러한 민족적 분열과 국가적 위기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한 것에 대한 기록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뒤늦게나마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고 파멸을 막으려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호세아 513절에 보면 에브라임(이스라엘)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하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 보다 강대국의 권력을 더 두려워하여 그것에 의지하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앗수르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의 상처를 낫게 할 수 없으므로, 참된 의사이신 주님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해 진실하게 회개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호세아 61-3은 회개와 참회의 노래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그러나 이 참회의 노래는 바로 그 다음 호6:4-6에 나오는 하나님의 소원에 대한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 심정 속에 있는 갈등과 번민에 대한 예언자의 감수성을 극도로 예민하게 끌어 올립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6:4)

여러분 여기서 하나님은 호세아가 그의 아내 고멜로 인하여 번민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연인인 이스라엘의 쉬 넘어짐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고 합시다. 심지어는 우리의 회개가 진정성을 갖게 하기 위하여 여러 날 동안 금식 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힘써 경건의 삶을 살았다고 합시다. 바로 그러한 모습이 호6:2-3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라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6:2-3)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이렇게 간절히 뉘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을 바랐지마는 정작 하나님의 응답은 너무나 딴 판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실망에 앞서 먼저 우리의 진정성이 없는 회개와 회개의 열매 없음에 대한 하나님의 추상같은 말씀을 경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면 하나님이 새벽빛 같이그리고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어김없이 받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라고 하시며 선지자들로 우리를 치시고 하나님 말씀으로 심판하시기를 빛처럼 빠르게 하시겠다 하십니다.(6:5) 정말이지 하나님과 우리는 코드가 안 맞아도 그렇게 안 맞을 수 없는, 만날 때 마다 티격태격하는 연인들 같지 않습니까?

이럴 때면 우리는 이렇게 불평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 제발 어느 때 까집니까? 어느 때 까지 그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감시하시고 벌하실 것입니까? 이젠 좀 절 가만히 나두시면 안됩니까? 죄악을 밥 먹듯이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작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있는 데 왜 저만 가지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가 본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호세아서 66절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인애/헤세드/언약적 충성심과 사랑이 너무나 연약하여 밤낮 넘어지기에 하나님이 탄식하시며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나는 비록 약하나 주의 힘은 강하다

나를 도와 주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나 걷겠네

주님 곁에 가까이 더 가까이 가리라

나를 도와 주시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리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심정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소원은 오늘 말씀을 다시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희생(sacrifice/제사)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자비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2.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 돈 때문에 인간 생명에 대한 자비 보다는 무자비한 희생이 강요되고 있습니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김 모 목사가 최근 설교에서 하나님이 공연히 (세월호를)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서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라고 하여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김 목사의 논리대로 하면 세월호의 희생자들은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또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이른바 형벌적 대속론이 억압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시장 논리에서는 희생과 사회적 비용이 경제적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어 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의 우상화로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모든 사회적 문제를 시장 체제가 요구하는 불가피한 희생으로 정당화합니다. 브라질의 한국계 평신도 가톨릭 신학자 정성모 교수는 [욕구와 시장, 그리고 신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상은 인간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신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용서하지도 않고, 그들의 외침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 외침을 들으시고 자비를 은사로 제공하시며, 희생을 요구하시지도 않는 분이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이삭을 잘라 먹었던 제자들을 비판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12:7)

여러분, 예수님을 정신없이 따라 다니다가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됩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것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으로 정죄됩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사유재산의 권리를 절대화하는 자본주의자들에게 그것은 남의 부동산에 무단 칩입하여 남의 재산을 무단 탈취한 중범죄입니다. 여러분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 훔쳐 먹은 죄로 여러 해 동안 형무소에 갇혔던 장발장의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무기형을 참다 못한 그는 탈옥을 했지만 사회 재적응에 실패합니다. 장발장은 그만 어이없이 교회의 주임 신부의 방에 들어가서 값나가는 금촛대를 훔침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그는 현장에서 붙잡힙니다. 이제 또 다시 무시무시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 바로 그 때입니다. 그 주임 신부가 장발장을 정죄하는 형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그 촛대는 내가 장발장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때 부터입니다. 장발장의 삶이 바뀐 것이 말이죠.

한 고대 교부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상으로 받은 선물로 누림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구원과 치유를 얻은 사람의 인격은 거룩하고 복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무상으로 받은 사람은 역시 무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되찾아 주는 사랑을 받았는데, 어떻게 이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복음의 기쁨] 8)

여러분, 우리도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상으로 받았으니 무상으로 전합시다!

나가는 말

사도 바울은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상으로 받아 거룩하고 복된 사도로 부름 받은 후에 역시 무상으로 그 복음을 전하면서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인 분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희생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독일의 성서학자 에른스트 케제만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때에 그리고 거룩한 행위로써 행해지는 것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속된 영역에서 육신적 실존을 바치는 것이다. 끊임없이 요구되는 일로서의 예배는 일상생활 안에서 일어나며 여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제물이요 사제이다.”

여러분, 한 학기 동안 때로는 금식기도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또 정기 예배를 꼬박 꼬박 참여하면서 거룩한 삶을 훈련하셨지요? 이제 방학이 되면, 그런 생활을 잠시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희생이 아니라 자비를원하시는 주님의 복음을 굳게 붙잡고 강요된 헌신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주님과 같이, 나는 비록 약하나 주님과 함께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남은 권고의 말씀을 읽어드림으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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