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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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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2013년2학기 개강예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9-04 00:00:00
조회수
12553
첨부파일

2013년 2학기 개강예배.hwp

 

20132학기 2013827일 개강예배

 

본문 : 이사야 42:1~4

제목 : 함께 생명을 향하여

 

 

 

다시 감신 교정으로 돌아오신 여러 학생들을 환영합니다. 여름동안 여러분, 여러 선교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셨습니다. 또 때로는 깊은 독서와 사색을 하셨을 것이고, 기도도 하시고, 사랑도 하시고, 여러 가지 좋은 시간을 보냈으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수님들께서도 그동안 밀린 연구와 활동을 마무리 하시고 멀리 떨어져 있는 식구들을 찾아 반갑게 만나는 좋은 시간도 가졌으리라 믿습니다. 또 우리 학교의 직원들은 학교에 남아서 대부분이 하반기 내년에 있을 대학기관 평가인증 준비를 위해서, 또 새 학기 준비를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저도 이번 방학동안에 중요한 두 가지 행사를 치렀는데, 지난 812일부터 19일까지 영국의 웨슬리 목사님이 다니셨던 옥스퍼드 대학교에, 세계감리교협의회 산하에 있는 세계 감리교 신학회에 참석해서 거의 한 일주일동안 학문의 공동체에서 기도하며 토론하며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822일부터 24일까지는, 이번에 신임 이사장님이 다음 주에 취임하시는데, 새로운 이사님들과 우리 교수님들이 함께 모여서 교수·이사 연찬회를 가져서 은혜롭고 참으로 영감을 주는 귀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번학기는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일들이 우리 학교 안팎에서 열리게 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우리 다음 주에 한일 교류 심포지움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제 개교 130주년을 앞두고, 역사편찬위원회를 조직을 해서 감신대의 신학과 신학교육, 감신대의 민족사에서의 궤적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또 다른 100년을 향한 역사편찬이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것의 일환으로 그동안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위대한 신학자들, 스승이었던 분들의 신학사상을 정리하며 특별히 일본 신학과의 교류 속에서 어떻게 그것이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연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9월 넷째 주 화요일은 개교 126주년 행사를 거행하면서 10년 뒤 우리 감신대의 비전을 제시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11월 둘째 주일에는 WCC 세계교회 협의회 제 10차 총회를 마치자마자 우리 감신대는 에큐메니칼 평화주간을 선포하고 우리와 자매관계를 갖고 있는 중국 베이징대학교의 종교학부와 우리 감신대가 함께하여 한중 종교와 사회에 대한 학술강연을 가질 예정입니다. 앞으로 중국 선교를 향한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중국의 첨단 지식인들이, 학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교수님이 어떤 생각으로 서로 교류할 것인가 큰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인 관심만이 아니라 선교적인 관심으로 많은 교계 인사들의 주목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학기 중의 우리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억될 중요한 모임은 아무래도 세계교회협의회 WCC 10차 총회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부산에서 1030일부터 118일까지 열리게 되는데, 전 세계 140여개국의 5000여명의 교회대표자들, 신학자들, 평신도지도자들, 기독교 사회운동가들 우리 개신교만이 아니라 카톨릭, 정교회, 복음주의, 오순절, 모든 교파를 망라한 정말 지구촌의 종교올림픽이라고 이야기될 수만큼 중요한 회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학교에서는 저를 비롯해서 몇 분의 교수님들과 10여명의 학생들이 대표로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모두가 참석하지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WCC 총회와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해서 접할 수 있도록, 수업시간에, 또는 여러 가지 다른 기타활동으로, 교수님들을 통해서, 참여자들이 와서 보고하는 것을 통해서, 또 우리가 이야기하는 에큐메니칼 평화주간을 통해서, WCC의 의미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우리학교에 큰 배움의 기회가 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개강예배 설교제목을, 이번 WCC 총회에서 승인될 새로운 에큐메니칼 선교문서의 제목으로부터 빌려왔습니다. 본래 이 문서의 제목은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속에서 선교와 전도제가 이 문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선교의 과제를 제시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선교를 위해서 동원되어야 할 신학교육의 중요성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이번 총회의 중심 본문이기도 한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우리 감신대의 웨슬리안,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비전을 다시 한 번 확언하고자 합니다. 우리 감신대의 신학의 비전은 웨슬리적인, 복음적인 것만이 아니라 에큐메니칼적인 가치, 정의·평화· 하나님의 생명, 이것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오늘 본문은 제 2이사야의 노래 중에서, 고난의 종의 첫 노래인 것입니다. 2이사야의 예언은 이사야 40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사야의 선언이 있죠.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러분 제 2이사야는 아직 포로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 이 예언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제국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 바로 그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스라엘 백성과 한국교회사이의 맥락적 상관성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고난의 종의 모습에서 이스라엘의 선교적 사명의 절정을 보여주셨다면,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본문을 다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에서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신학적·선교적 사명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복음서 기자들은 한 결같이 이 말씀을, 예수님의 메시아운동의 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태복음 317, 마가복음 111, 누가복음 321절이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예수님께서 이 이사야 본문에 입각해서 들으신 것이라고 한 것이죠. 특별히 누가복음 4장은 이사야서의 또 다른 곳, 이사야 611, 2절을 인용하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옥에 갇힌 자를 자유하게 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우리 구원과 해방의 사역을 하시게 된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이 예수님이라고 하는 이러한 신약성경적인 고백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야 열망을,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 열망을, 그 민중의 열망을, 백성들의 갈망을, 자신의 선포 한 가운데 받아들이시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70년 포로기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정의에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의 하나님 나라 열망을 담아, 그것의 고난의 종의 비전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바로 그 열망을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지에 담아, 스스로가 고난의 종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저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다,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역사의 변두리에서 신음하는 생명들의 갈망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수용하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함께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메시아요, 고난의 종이요, 십자가 지신 주님임을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이번 에큐메니칼 총회의 주제가,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라는 기도문으로 되어 있을까요? 이 한반도에서! 분단 60년이 된 이 한반도에서, 아직도 절절히 신음하고, 피 흘리는 1천만 이산가족이 있는 이 한반도에서! 아직 휴전이 종식되지 못하고, 아직 평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이 한반도에서! 전 세계 교회는 모여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교가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늘이나 옛날이나, 엄청난 생명의 억압이 있을 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의해서 가난한 자가 양산되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어지고, 생태계의 오염에 의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위협을 받고, 소수 민족이 전쟁과 갈등 속에서 죽어가고, 에이즈와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받고, 이 수많은 불의한 상황 한 가운데서, 생명의 억압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탄식하시는 마음으로부터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12장에도 나옵니다, 이는 N.T. 라이트라고 하는 성서학자가 주장하듯이, 이사야 시대로부터, 예수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강대한 제국에 의해서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불의가 횡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은 이방 땅에서만 아니라, 바벨론 포로기만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자기 땅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로마제국에 의해서, 유배되어지고 탄식하고 신음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펼칠 참 메시야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나라의 권력자들의 등장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치고 나팔 불고, 온갖 고함과 함성으로 잔뜩 두려움과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세상권력자의 등장과 달리,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세상의 죄를 짊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 지르는 귀신들을 도리어 꾸짖으시면서, 고침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잠잠케 하시는 모습으로 다가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역을 마케팅하지 않으셨어요. 겸비한 섬김의 길,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신 예수님의 길이었기 때문에, 고난의 종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무엇을 뜻하는 것이죠? 이 시대의 사회적인 약자들, 교회가 신학이 그들 편에 서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시행해야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에서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은 매우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군부독재를 자행하기 위해서 쿠데타와 민간인 대학살을 하던 세력일수록 정의 구현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회적 소수자들과 약자들만을 강하게 징벌하고 징계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윤리신학적 용어로 징벌적 정의, retributive justice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회법적에서 우리가 말하는 정의란 모두 징벌적 정의죠. 잘못한 자에게 대해서, 곧 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히는 가해자들에 대한 징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계명은 징벌적 정의가 과도하게 집행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살펴보십시오. 과연 징벌적 정의가 우리 사회의 사법제도 속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까? 실제로는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권력과 돈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정의의 심판을 피해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그리고 정작, 징벌적 정의가 가혹하게 집행되는 대상은 이른바 무전 유죄, 돈 없으면 죄인이 되는, 힘없고 불행한 환경가운데서 살았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까? 철저히 징벌적 정의에 입각한 사법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미국인데, 미국 흑인들의 80프로 이상이 감옥을 간 경험이 있다는 충격적인 데이터가 있어요. 감옥에 들어가면 교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운 범죄의 기술을 배웁니다. 폭력에 대한 폭력의 대응이 나은 악순환이죠. 이 땅에서 그치지 않고 자행되는 전쟁과 온갖 폭력으로 인한 불행은 단숨에 평화로 바뀌지 않습니다. 징벌적 정의에 기초한 사법제도와 그것을 지지하는 종교와 윤리가 지배하는 한 진정한 평화는 이 땅에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근본주의 신학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원리주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폭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팍스로마나! 로마의 평화는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 팍스크리스티!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최근 미국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just peace, 정의로운 평화라고 하는 새로운 윤리와 삶의 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른바 회복적 정의 restorative justice라고 하는 그러한 개념인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시대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감독이 주도했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시스템, 인종차별의 무서운 제도속에서 흑인들을 가해하고, 죽이고 살육했던 백인, 그 인간 백정들을 그냥 용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그 가해자들을 감옥에 쳐가지고 사형시키는 것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정한 관계 회복을 통해서 회복적 정의를 이루고, 피해자였던 흑인이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 받음으로써,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위대한 감리교인, 그리하여 민주주의와 세상의 희망이 되는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정의란 징벌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해자의, 피해를 입은 자의 상처의 치유를 위해 양자사이의 파괴된 관계회복을 통해서 오는 회복적 정의, 관계적 정의인 것입니다.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이 한반도에 오셔서 이제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서 이 땅에 시행할 하나님의 정의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단의 이 징벌적 정의개념을 가지고 세상법정에 가서 물고 뜯고 싸우고 하는 이 모든 것도 모두 종식되어야 합니다. 이제 새로운 교회의 질서가,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같이 우리 교단에서부터, 우리 교회에서부터, 우리 감신대에서부터, 우리 가슴에서부터 흘러넘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생명을 향하여, together toward life, 이것은 우리시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화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독선적으로 위선적으로 바리새인처럼 정의를 부르짖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역은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424절에 예언한대로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땅 끝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여러분들 바로 이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사람들입니다. 가슴 벅찬, 하나님의 정의의 하수같이 흐르는 그 열정을 가지고, 군림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제국의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종이 되어서, 고난의 종이 되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뒤따라가면서, 부활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나가는 그러한 소명자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감신대 신학연구와 신학교육의 비전도 새로운 웨슬리안 에큐메니칼 비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WCC 중앙위원회는 20128월에 신학교육에 대한 에큐메니칼 서약문, “변화하는 세계 기독교 지평에서의 리더십 형성이라는 중요한 문서를 승인했습니다. 이 문서들은 앞으로 신학교육을 담당하는 우리 교수들이 철저히 공부해야 할 문서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문서는 오늘날 신학교육의 새로운 글로벌 위기를 진단하고 교회·선교·신학교육의 불가분리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서를 접하면서, 제 눈에 확 들어왔던 내용이 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학교육 과정은 현행 교회와 교단의 현실과 정체성을 모두 재현하고 반영하지만, 또한 동시에 예언자적인 역할아래서, 모든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부터, 기존 교회와 세상의 패턴에도 도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제사장적인 봉사를 하고, 목회자를 양성하고, 말씀 중심의 그런 사역자를 일구어내고 기도 많이 하고 정말 하나님의 심정에 합한 그러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학교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잃어버리면, 맛잃은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단이 잘못 갔을 때, “잘못간다라고 지적을 해야 되요. “같이 회개하자고 우리가 주장을 해야 되요. 사회가 잘못갔을 때, 민족이 잘못했을 때,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여야 되어요.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또 존경하는 교수님 여러분, 이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신학교육의 비전과 방향은 진정으로 웨슬리안 복음주의에 입각한 것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에큐메니칼 생명·정의·평화의 가치에 입각한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번학기에 기도와 학문, 선교·실천 현장에 열심히 참여함으로 여러분과 제가 모두가 감신대의 웨슬리안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의 글로벌향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리고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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