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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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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학기 개강예배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8-26 14:53:23
조회수
9009
첨부파일

2014년 가을학기 개강예배.hwp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들어가는 말

   

2014년 가을학기를 열면서 다시 반가운 얼굴로 여러분을 만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름 방학 동안에 여러분들 중에는 가까이는 국내에서 멀리는 해외에서 잠시나마 여행을 다녀온 분들이 여럿 있으리라 봅니다. 교수님들 가운데도 연구학기를 마치고 돌아온 분들이 있고 연구학기를 맞이한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8월 초에 인도감리교회의 초청으로 장성배 교수님과 김동환 박사님과 함께 아시아신학협의회에 다녀왔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모인 목사님들과 감독님을 모시고 웨슬리의 신학, 목회, 선교에 대한 강의를 통해 귀한 열매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강의했던 제목은 우리의 웨슬리안 신앙 여정: 오늘의 웨슬리 신학이었습니다. 우리 웨슬리안, 또는 감리교인들은 신앙을 단지 순간적인 회심의 사건으로만 보지 않으며, 온전한 거룩함과 복됨에 이르는 신실한 과정으로도 봅니다. 제가 인도를 처음 방문하는 터라 기도하는 중에 웨슬리 신학을 인도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마하트마 간디의 관심과 연관짓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간디는 매일 아침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를 읽고 묵상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44개의 표준 설교들 가운데 13개가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입니다. 웨슬리에게 산상수훈은 그야말로 성경적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성경 중의 성경입니다.

   

웨슬리 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산상수훈에 대한 웨슬리의 연속 설교는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이른바 칭의의 신앙과 사랑으로 일하는, 이른바 성화의 믿음을 통합한 가장 웨슬리적인 신학을 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제 강의를 경청해 주었던 한 인도 목사님이 마하트마 간디가 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기독교는 비범한데, 기독교인들은 평범하다.” 아마 간디는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해서 기독교인이기를 포기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저는 웨슬리안을 정의하기를 평범한 신자들이지만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을 나선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을 평범한 신자들이 걸어가야 할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으로 초대하고자 하는 초대장의 내용은 바로 로마서 117, 일찍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로마서의 주제라고 보았던 본문입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을 웨슬리 신학의 관점과 최근의 바울 신학에 대한 재해석의 논점을 참고하여 오늘 다종교 시대의 신앙인의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합니다.

로마서에 내포된 세 가지 여정

로마서가 기록된 시대적 배경은 클라우디아 황제에 의해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자 로마를 잠시 떠났던 사람들이 네로 황제 시대가 되어 다시 귀환하게 되면서 로마 교회에 유대인 출신 교우들과 이방인 출신 교우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15:23, 28에 나타난 대로 사도 바울은 스페인(서바나)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스페인은 그야말로 서쪽에 있는 땅 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게 되도록 사도 바울은 그의 선교 초기의 전진 기지였던 안디옥으로부터 그의 관심을 새로운 전진 기지인 로마로 돌리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로마서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자신의 선교의 전진 기지로 삼고자 로마 교우들을 복음으로 설득하고 복음화의 사명에 동참하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에 내포된 첫 번째 여정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여정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로마서의 내용 자체에서 찾아야 합니다. 첫째 여정이 주로 공간이동적이라면, 둘째 여정은 주로 시간여행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멀리 구약시대의 믿음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사도 바울 당시에 로마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이르는 여정인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모세나 여러 선지자들 또는 다윗왕가를 거론하는 대신에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최초의 인물로 거론했을까요?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것을 보도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창대하게 하기 위함”(12:2)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밤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시며 100세가 다 된 아브람이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자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15:6).

   

사도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로마서라는 교향곡의 제1악장의 클라이맥스를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르는 믿음의 여정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4:17)”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은 아브라함의 신앙, 곧 그의 아내 사라의 죽은 태를 여시고 새 생명을 잉태하게 하심을 믿은 것처럼 사도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것을 믿음으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3:25)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에 내포된 세 번째 여정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자체 안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구절은 그리스어로 엑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의 번역인데,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믿음 또는 신실함을 가리키는 피스티스로부터 피스티스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피스티스로부터 시작해서 피스티스로 마치는 여정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본문을 살펴봅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것이 본문의 첫 구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인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제임스 던의 로마서 주석이나 톰 라이트의 바울 연구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못했지만,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곧 하나님의 백성을 온 땅에 편만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의 불신실과 불의를 예수님의 신실함과 의로 고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 구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는 로마서 3:22에 연결해 이해하면 더 분명해 집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2와 갈3:22에 나오는 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또는 엑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는 과거 30년 동안 신약성서학계에서 줄 곧 논쟁의 불씨가 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그리스어 목적어적 소유격)로 번역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그리스어 주어적 소유격)로 번역되는 것이 옳은가가 관건입니다. 저는 후자가 바르다고 봅니다. 본문의 흐름상으로 보아도 전자로 번역하면 동어 반복이 됩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바꾸어 읽고 싶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롬1:17에서 인용하는 하박국2:4기록된 바 의인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저는 이것이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본문의 핵심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을 위하여

   

사랑하는 감신인 여러분, 진실로 우리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신앙과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으로 초대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신앙 여정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인간의 믿음에 이르는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만 구원 받고, 그 어떠한 역경과 환란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저녁에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수 만 명의 감리교회 청년들이 모여 뜨거운 집회를 가졌습니다. 저도 참여하여 함께 부른 찬양 중에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낀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어떠한 시련이 와도 수많은 유혹 속에도

신실하신 주님 약속 나 붙들리라

세상이 이해 못하고 우리를 조롱하여도

신실하신 주님 약속만 붙들리라

결코 돌아서지 않으리

   

신실하신 주님 약속만 붙드는 것이 참 신앙, 참 믿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입니다. 오직 신실하신 주님의 은혜만을 믿는 것, 오직 믿음, sola fide!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은 인간이 꿈꾸는 어떤 환상이 아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믿음이 도덕적 개선이나 선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믿음으로만 충분하지 않으니 행위를 해야만 의로와지고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는 우를 범한다. ... 믿음은 생동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념으로서 너무나 확실하여 그 믿음 때문에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게 한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우리 모두의 믿음의 기초이고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여정은 그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더 테레사가 얘기하듯이 성공을 위해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신실하도록 부름받았기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사모하도록, 그리하여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동반자로, 거룩한 파트너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앞의 찬양은 원래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를 새롭게 편곡한 것입니다. 이 원래 찬양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라야한다는 것을 권면합니다. 지난 번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을 때, 마지막 날 명동 성당에서 있었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그의 위로를 받은 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내 수십년 쌓인 한이 풀렸다.”고 토로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현장에 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계셨을 때 수많은 병자들과 상처입고 한맺힌 영혼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위로와 치유 그리고 진정한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면, 예수님 닮은 실천을 해야 합니다. 세월호 유족들을 위시하여 아직도 이 땅에서 위로받지 못하고 상처입고 신음하는 이웃들 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입니다. 여러분의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비범해지십시요! 톰 라이트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해서 로마 제국을 복음화 시켰을까에 대한 인터뷰 기자의 질문에 세 가지 비결을 말합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비범한 삶, 성적인 성결,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그것입니다. 이중에서도 비범한 삶이 그 첫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을 돌아보고 사랑했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원수라 할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제국에서는 오직 엘리트에게만 제공되던 의료와 교육의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제공하는 봉사에 앞장 선 것입니다.

   

나가는 말

   

신실함의 비범한 여정으로 초대받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신실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장 작은 일상에서부터, 곧 가장 평범한 삶 속에서도 결코 죄와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성결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보화가 담겨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거나 낙담하여 주저앉아 있지 말고,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범한 꿈과 비전을 품으십시요! 십자가지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부활의 소망으로 전진하십시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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