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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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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27주년 기념예배 설교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09-23 17:23:39
조회수
8682
첨부파일

개교_127주년_기념예배설교.hwp

 

개교 127주년 기념예배 설교

   

본문: 사도행전 4:23-31, 에베소서 2:11-22

   

평화를 만드는 전도자

   

   

   

1. 오늘 감리교신학대학교 개교 127주년을 맞이하여 평화를 만드는 전도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난 세기에 분단된 우리 민족에게 이 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평화통일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과제로 생각하는 것은 감신대가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양성하는 사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의 사명과 평화통일의 과제는 결코 모순하지 않으며 도리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잘 드러낸 모자이크 작품이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한 성당의 제단 천정에 설치된 이 작품은 북한의 예술가가 만든 것입니다.

   

우선 하단 중심을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계시고 십자가 좌우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모자이크 성화의 놀라운 점은 천정 중앙에 부활 승천하시어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의 좌우에 이른바 남남북녀들의 무리가 마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모습으로 서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양으로 재림하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는 예수님께 우리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간절히 구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2. 일찍이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평화를 만드는 전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죄 짓는 것만을 두려워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열망하는 백 명의 설교자들을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그들이 목회자이건 평신도이건 상관없이 그들만 있다면 나는 지옥의 문을 흔들어댈 수 있을 것입니다.”

   

3. 오늘날 세계 교회와 기독교 운동 안에서 복음전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증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평화 만들기/ Peacemaking 교육의 참된 의미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갑니다. 사실 오랫동안 사회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춘 평화 운동가들은 전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에만 몰두하는 전도자들은 평화 만들기에 소홀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렇습니다. 복음전도와 평화 만들기를 통합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고대 성경적 기독교의 원초적 케리그마/선포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4.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4:23-24와 에베소서 2:14-18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곧 평화를 선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의 의미와 능력은 다

름아닌 하나님과의 화해와 평화를 뜻했으며, 나아가 역사적으로 원수였던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게 했기 때문입니다.(10: 3:28)

   

5. 다시 말해서 성경적 기독교의 탄생을 가져왔던 부활 신앙은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주요 그리스도”(2:36)로서 또 다른 주체로 체험한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보내셨던 성령님은 이 세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언제나 상기시키십니다.(2:38; 고후3:17-18)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짐의 더 훌륭한 목적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과거에 원수들이었던 사람들로부터 새 가족, 새 식구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복음을 곧 평화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고대 기독교의 교부들이었던 저스틴, 이레네우스, 터틀리안, 그리고 오리겐 등은 교회를 통해 로마 제국 안에서 서로 다른 종족과 민족이었던 사람들이 형제자매로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난 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실재가 이뤄진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7. 21세기에 들어와서 세계 기독교는 중대한 축의 이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 중반 이후부터 유럽과 북미 중심의 기독교의 축이 지구 남반부/Global South인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로 거대한 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 기독교의 지형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이 교파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201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서 열렸던 제3차 로잔대회의 케이프 타운 위임’(The Cape Town Commitment)입니다. 이에 따르면 복음전도는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심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통합적인 선교에서 복음 선포는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고 사회 참여는 복음전도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통합적이고 건강한 복음전도를 하게 하기 위해 교회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 근거하여 교회는 교만과 부패 그리고 번영주의를 회개하고 겸손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삶으로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8. 둘째, 2013년 대한민국의 부산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10차 총회의 선교문서인 함께 생명을 향하여: 세계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의 전도와 선교에 의하면 복음전도는 온전한 복음을 온전한 세계 안에서 온전한 인류에게 소통하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전도는 겸손과 모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에 근거하며, 타자들과의 대화 안에서 풍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가 없는 복음전도는 성립할 수 없고, 복음전도가 없는 기독교 연대활동 역시 성립하지 않습니다.

   

9. 셋째, 2013년에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 의하면 복음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교황에 따르면 오늘날 물질주의, 소비주의, 향락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에 교회와 신학의 일차적인 과제는 시대의 징조를 복음적으로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복음은 전도자들로 하여금 배척의 경제와 돈의 새로운 우상숭배, 그리고 섬기기보다는 지배하려는 경제 체제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안일에 빠져있는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위에서 얻어터지고 상처입고 더러워진 교회가 더 훌륭합니다.

   

10. , 이제부터 웨슬리안 전통에서 본 평화 만들기를 위한 복음전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회 첫 연회가 열렸던 해인 1744년에 성경적 기독교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4:31을 본문으로 한 이 설교는 감리교 선언으로 보아 무방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러분은 칼 맑스가 1848년에 발표한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기억하십니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것을 능가하는 위대한 선언이 바로 이 설교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위에 감리교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세우신 것은 어떤 새로운 종파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을 개혁하고, 특별히 교회를 개혁하고 성경적 성결을 온 땅위에 전파하기 위함이다.”(1744년 감리교 연회 감리교선언 중에서) 웨슬리 목사님은 성경적 기독교라는 설교의 서두에서 초대교회에서 성령으로 충만해짐의 더 훌륭한 목적은 비범한 은사들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화, 기쁨, 사랑과 같은 성령의 평범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11. 18세기 웨슬리 목사님 당시에 비범한/extraordinary이라는 말과 평범한/ordinary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는 다르게 적용되어야 할 듯합니다. 웨슬리는 성령의 은사를 비범하다고 했고 성령의 열매는 평범하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오순절 교회와 은사운동에 가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는 도리어 평범하다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성령의 평범한 열매를 맺는 것이 도리어 쉽지 않으며 이제는 그것이 더 비범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국부이자 성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매일 아침 바그바드기타와 함께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었다고 합니다. 간디는 기독교는 비범하지만 기독교인은 평범하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이유라고 했다 합니다. 여러분, 산상수훈 그중에서도 8, 그리고 그중에서도 7째 복인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은 오늘날 아시아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비범한 삶에 이르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중국 삼자교회의 지도자 팅주교도 산상수훈의 정신을 상실한 기독교, 특히 개신교회의 오직 믿음주의’(sola fideism)가 율법무용론에 빠진다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12. 그렇다면 웨슬리 목사님이 말하는 성경적 기독교의 평화를 만드는 복음전도의 제1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의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성령충만한 영혼의 변화입니다. 거듭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 안에 받아들여진”(1:6)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들의 마음을 주장”(3:15)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한 마음, 한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13. 평화를 만드는 복음전도의 제2원리는 시대의 징조에 대한 반문화적/countercultural 분별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악한 상태에 처한 온 세상‘(요일5:19) 안에서 신음하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주님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전도를 통해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에게는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고 하고, 영적으로 깨어난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보혜사가 계심을 선포하며, 믿는 자들은 사랑과 성결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합니다.

   

14. 이렇게 복음전도가 진행이 되면, 걸려 넘어지게 된 이 세상의 제국은 반격을 합니다. 복음전도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 명성을 추구하는 자들,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 그리고 종교를 추종하는 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들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이 사람들”(17:6)에게 분노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옥의 기둥이 흔들리고, 하나님 나라가 점점 더 확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경건의 비밀’(딤전3:16)만이 아니라 불법의 신비’(살후2:7)도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15. 평화를 만드는 복음전도의 제3원리는 삼중적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 선교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shalom입니다.(2:2,4). 둘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ubuntu입니다.(11:10-12) 셋째로, 사람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평화/相生입니다.(11:6,9)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선교의 대행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주심을 경험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진 증인들/순교자들(witnesses/martyrs)(1:8)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전도에 일로매진합니다.(28:31)

   

16. 이제 감신대의 사명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남조선이 가나안 땅입네까?” 이 질문은 올 해 초에 상영된 북한 지하교회의 실상을 그린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입니다.

   

17. 이미 우리 학교에도 10여명의 탈북 신학도들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1,600여명에 달하는 감신대 학생들, 교수와 직원들로 하여금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2:5)는 성령님의 음성의 대변자들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탈북 신학도들과 NK 즉 새로운 코리아의 복음화를 위해 매주 화요일 점심에 금식기도하는 학생 서클, 그리고 대동강변에 있었던 감리교 성화 신학교의 재건과 북한을 북한 신학생들의 양성을 통해 복음화하려는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매월 한 번 씩 모여 기도회와 독서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달 모임은 930일 화요일 다섯 시에 있습니다.

   

18. 지난 학기 세월호 참사 직후에 한 탈북 신학도가 저를 찾아와 이런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학생은 북한에서 기근으로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과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공감한다면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영적 나태 가운데 빠져 트라우마를 겪은 이웃의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해 진 이 땅의 기독교인들을 깨우는 하나님의 시대적 징조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나(23:3; 24:1) 오늘이나 식민지 상황에 놓인 사회에서는 남성들은 대체로 비겁하나 여성들은 대체로 거침이 없습니다.

   

19. 그렇습니다. 성령의 비범한 열매를 맺으려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Bear the Cross to bear the fruit.” “배고픔 보다 더한 목마름이라는 책의 저자인 한 탈북 성도이며 순교자는 자신의 외동딸의 한국행을 반대했습니다. 딸이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하는 딸이야말로 이 시대 예수님의 복음의 참 증인이자 참 순교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들을 이기셨습니다.”(2:15)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은 오늘날 하나님의 계시의 문화적 역사적 담지자들이며, 성령님은 그들을 제국의 환자들’/patients로부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기고, 찬양하고, 평화를 만드는 대행자들/agents로 변화시키십니다.

   

20.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복음의 참 증인이며 참 순교자인 분들의 모범을 본받아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가까이 사모하며 급기야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기 까지 그 십자가를 노래하며, 춤추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만 평화를 만드는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2:15b, 16a)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7b-19)

   

21.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20168월 말에 미국 텍사스 주 휴스톤에서 열릴 세계감리교대회의 주제와 로고를 보여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하나: 한 하나님, 한 백성, 한 선교

   

22. 저는 여러분이 평화를 만드는 전도자로서 늘 가까이 사모하고, 급기야 짊어지기 까지 해야 할 십자가를 노래하고 춤추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호소하면서 함께 춤추며 찬양 하고자 합니다.

   

씨앗이 흙을 만나, 새 싹이 되듯

너와 나는 새로 만나 새 사람 되자

하늘이 땅을 만나 새 역사되듯

너와 나는 새로 만나 새 사람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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