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14년 가을학기 종강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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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9 10: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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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가을학기 종강예배설교
“빛을 들고 세상으로”
본문: 사60:1-4. 마5:14-16, 롬13:11-14
우리는 이번 한 학기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마치고 이제는 공부했던 것을 정리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다음 주부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 주가 시작이 되고, 학기가 마쳐지며 한 해의 막바지에 햇볕이 점점 짧아지고 식어지며 어둠의 양이 증가하는 때입니다. 그렇지만 대강절은 주님 오심을 기다리면서 첫 촛불을 밝히고 4주 동안 촛불의 수효가 늘어나며 성탄절이 되면 이 땅에 참 빛으로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온 세상의 성도와 함께 축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다시 새해를 바라보며, 대강절 주님의 강림을 기대하는 절기 동안에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면서 최근 몇 년 간 세계교회의 매우 의미심장한 기후변화를 주목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감신대가 나아가야할 영적, 학문적 방향을 가늠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기념비적인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2012년 2013년 그리고 2014년에 이르는 이년 여의 짧은 과정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에 새로운 복음전도에 대한 획기적인 관심이 교단을 초월해서 세계교회에서 증폭되었던 기간으로 교회사가들은 기록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기독교의 축이 지구 남반부로 이동하는 거대한 지형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에서 교회는 지속적으로 쇠퇴해 가고 있으며 심각한 세속화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과 삶의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시아와 태평양,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의 교회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전도와 선교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르고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면서 최근 몇 년간 세계 복음주의권은 물론이고, 에큐메니칼 진영,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잇달아 중요한 선교문서를 채택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새로운 복음전도의 긴급한 필요성을 역설해 왔습니다. 2012년 남아프리카에서 열렸던 제3차 로잔회의 문서나, 2013년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 선교문서, 그리고 2013년 말에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화를 위한 권고문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성령께서 현대교회를 향하신 간절한 부르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 시대를 향한 성령의 간절한 부르심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복음의 기쁨으로의 초대입니다. 저는 복음의 기쁨을 복음의 빛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빛이라는 말을 기쁨으로 대치해서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어나라 기쁨을 발하라. 이는 네 기쁨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기쁨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같이 너희 기쁨이 사람 앞에 미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기쁨의 갑옷을 입자.”
여러분, 참 생명이신 참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에 의해서 무절제한 욕망으로 무뎌진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무관심합니다. 또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는 고요하지만 영구적 가치를 가지는 복음의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합니까?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우리는 항상 기뻐합니까? 아니면 부활이 없는 사순절만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팔복을 말씀하시는 중에 그 절정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하셨는지를 최근에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팔복이 무엇입니까? 세속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이 복되다고 하신 것들은 죄다 이 세상의 행복과 쾌락 출세와 번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를 복되다 하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바로 다음에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는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이다.”라고 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주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추구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고, 오직 주님의 사람들,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고 선언하십니까? 저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주님 말씀 안에 담겨 있기 떄무에 거기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면서 숨겨지지 못하는 “산 위에 있는 동네”와 동일시 하셨을까요? 영어로 “산 위에 있는 동네”, “A city on a hill,” 산 위에 있는 동네, 달동네가 연상되죠? 근데 그것이 아닙니다. 영어표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 “A city on a hill” 아주 세련된 도회적 이미지를 연상시켜 줍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 여기서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가장 높이 건설된 마을인 예루살렘을 생각하지 않겠는가!”(나를 따르라, 132) 이것은 실제로 본회퍼가 1935년에 칭스터 목사 훈련소 예배에서 “Jerusalem, du
hochgebaute Stadt”라고 하는 루터교 찬양을 불렀던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이 찬양은 이렇게 됩니다.
“예루살렘, 그대 높이 세워진 도성이여,
나 하나님이 그대 안에 있지 아니한가!
갈망하는 이 마음 그대 너무 그리워
내 마음 내 안에 없네.
산과 계곡 너머 저 멀리
평원을 너머 저 멀리
내 마음 헤매고 다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신속히
빠져나가네.”
요한 마이화르트가 1626년에 지은 이 찬양은 계시록 21:2에 근거한 것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러분, 하나님 심정이 품으셨던 예루살렘, “저 밝고도 빛난 시온성”은 우리 주님의 신부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늘로부터 유래하는 도성인 것입니다. 물론 악하고 음란한 이 세속도시들 한가운데 과연 그러한 ‘하나님의 도성’, ‘cvitas Dei’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절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이 품으신 하나님의 꿈을 부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성경에서 여부스 족속의 땅을 취하여 시온성을 건설했던 다윗 왕을 위시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도성, 아니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도 예외가 아니라 도리어 가장 탁월한 전형이십니다. 지금 주님은 세상의 빛인 제자들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생각하시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상으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우리 감신 선지 동산을 오르내릴 때 마다,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생각하고, 감신 동산을 내 마음에 떠올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꿈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동산,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주님이 오매불망 애태워 사모하시는 이 동산, 온 세상천지가 다 흑암이어도 밝고도 묘한 빛으로, 기쁨으로 충만한 이 동산을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감신 선지 동산은 이 시대의 작은 하나님의 도성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그의 대작 [신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도성을 ‘세상의 도성’, ‘civitas terrena’ 그것과 확연히 구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성의 핵심 가치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세상 나라는 자기 사랑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신학교는 산 위의 동네로서 비록 작지만, 하나님의 작은 도성으로서 하나님 사랑의 핵심가치를 중심으로 지성, 영성, 인성 훈련과 연마의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학교가 그러한 역할을 하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등경 위의 등불이 집 안 모든 사람들을 비추듯이, 온 세상을 비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 된 신학교가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아도 그 존재 만으로 세상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 된 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주님은 신학교가 등불로서 고의적으로 이동을 시켜서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역동적인 주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16절에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우리 감신의 아들과 딸들 가운데는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빛의 사람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늘 우리가 상기해야 할 일지만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일곱 사람이 우리 감신 출신입니다. 일제 때 농촌 계몽운동의 꽃이었던 최용신 여사로부터 시작하여 최근에는 세계감리교 여선교회 회장을 지냈고 우리나라 여성운동과 사회봉사운동의 선구자였던 김옥라 선생, 감신출신들입니다. 1978년 3월 1일에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로비에 민족대표 7인상 부조를 설치하면서 청록파 시인이었던 박두진 선생이 송시를 썼습니다.
“그때 밤 깊어 어둡고 적막할 때
겨레 이미 기진해 쓰러져 잠들었을 때
혼자서 깨어있어 기도하던 이들이어
나라 겨레 근심하여 눈물 흘리던 이들이어
그때 굶주린 이리떼 울부짖고
양떼들 피 흘리며 쫓기어 흩어질 때
주의 말씀 뜨겁게 진리로 받든 이들이어
주님의 뜻 이땅 위에서 피로써 심은 이들이어
나라를 잃고 주권을 빼앗기는 일이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의와 인도를 짓밟히는 일이
진실로 얼마나 슬프고 뼈아픈 일인가를
얼마나 불행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인가를
그때는 더러는 알았지만 모두는 다 몰랐을 때
가장 먼저 깨어있어 깃발 쳐든 이들이어
캄캄한 그 밤에 어둠의 불을 지른 이들이어
뜨거운 그 사도정신 십자가의 가르침
자유와 그 자주독립의 깃발 쳐든 이들이어
정의와 그 겨레 해방을 소리외친 이들이어
서로 갈리는 분파보다는 겨레 모두 하나로
하늘의 뜻 하늘에서 처럼 땅에 이루기 위하여
三.一 선언 민족대표로 솔선하여 나선
감신출신 일곱대표 빛나는 이름
아! 이 땅에
감리교와 그 신학대학 기리 있는 한
대대로 이 나라 겨레 기리 있는 한
정의와 그 자유 사랑과 그 평화
주의말씀 진리로서 기리 있는 한
당신들의 쳐든 깃발 내리워지지 않으리라
당신들의 외친 절규 지워지지 않으리라
당신들의 처음 이름 기리 빛나리라
당신들의 처음 기도 기리 이루어지리라”
저는 우리 역사의 위인들만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훌륭한 빛이 된 감신인들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해 전에 제가 신학과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 학우가 백혈병에 걸려 죽어 가면서도 자기 환우들을 위해서 골수 기증운동을 학교에서 벌였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함께 기도하면서 1학년 학생들만 무려 40여명의 학생들이 기증서약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사랑하는 그 제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갔습니다. 또 몇 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대학원 세미나를 지도하는데 한 학생이 결석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학생이 그가 1학년 때 서약한 골수를 기증하기 위해서 수술을 받으러 간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결혼해서 아기도 있었고 공부하랴 사역하랴 무척 고단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으로 불려간 자신의 학우와 약속했고, 하나님 앞에서 서약한 선행을 기어이 실행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 때, 그 학생이 드나들던 병원의 환우들과 간병인들 그리고 의료인들이 얼마나 이 한 신학도의 착한 행실로 감동을 받았을까를 생각해 보며 깊은 감격을 느꼈습니다.
최근에 모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마 지금 우리 중에 있는 학생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대학원 재학생 한 사람의 선행을 듣게 되었습니다. 몇 주전 늦가을비가 꽤나 차갑게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잠시 비를 피해 서 있던 교수님은 서대문 역 출구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추위에 떨고 있던 한 노숙자 할아버지를 돕는 낯익은 감신 대학원 학생을 보셨습니다. 그 학생은 우산을 받쳐 들고 노인을 감싸 안으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면서 주머니에서 우유와 빵을 그분에게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은 비를 맞으며 담담하게 발을 옮기는 그 감신 학생의 모습을 저는 제 마음속에 떠 올리며 “아, 역시 감신은 아직 살아 있구나.” 또 다른 작은 등불 하나가 제 영혼의 영상에 떠오르는 듯한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어둠을 물리치고 진리로 해방하니 그 이름은 전도자 그 이름은 전도자” 여러분 이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바로 우리 학교 교가 2절 첫 소절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신인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빛을 들고 일어서십시요! 그리고 빛을 발하십시오. 여러분의 빛을 들고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십시오. 절망에 빠진 형제에게 소망을, 방황하는 자매에겐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러분이 받은 복음의 기쁨을, 복음의 빛을 나누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긴 겨울 방학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떤 동물들처럼 긴 동면, 겨울잠에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 춥고 어두운 계절에도 여러분은 세상의 빛임을 잊지 마시고, 늘 깨어 있어 어둠의 일을 물리치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내년 새 봄 새 학기가 되면, 우주 만물만 다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이 새로운 각성으로 감신을 새롭게 하고, 이 시대 청년 대학생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며, 한국교회의 소망이 되고, 세계교회의 귀감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일어나 소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 나아가라
내 빛 비춰라 모두 알도록
빛을 들고 세상으로
빛을 들고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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