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15학년도 입학식 및 개강예배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5-03-04 1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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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학년도 입학식 및 개강예배
본문: 롬1:1-7
제목: 부르심의 은혜와 사명
1. 2015학년도에 학부 211명, 대학원 249명 도합 460명의 신입생 여러분의 감신대와 감신대 대학원 입학을 축하합니다. 올 해는 민족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남북으로 분단된지 70년이 되고,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지는 1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학교의 3회 졸업생으로 정동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에서 목회하셨고 민족의 독립과 복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손정도 목사님은 대부흥 운동 직후에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께 사도행전 1:6에 근거하여 여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아마도 손목사님은 하나님께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허락하시는 때를 여쭈었던 것일테지요. 그러자 성령께서는 사도행전 1:7에 근거하여 이렇게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러자 손정도 목사님은 저 유명한 사도행전 1:8을 당대의 선교 명령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는 한양 또는 평양과 온 조선이며, 사마리아와 땅 끝은 만주와 중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분은 감리교회 최초로 중국 선교사로 만주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고통당하던 동족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손정도 목사님의 질문과 그의 깨달음과 소명은 오늘날도 유효합니까? 1945년 민족이 분단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숨만 쉬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토로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 왔습니다. 분단, 아니 민족의 포로기 70년인 올 해에 우리도 주님께 묻습니다: “이 민족을 평화적으로 통일시키심이 이때니이까?” 제자들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우리가 나아갈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발터 클라이버 전 독일 감리교회 감독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적 통일, 특히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을 생각할 때 독일의 통일은 복음에 포함된 약속이 아니었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이기에 아주 책임있게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뒤돌아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통일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면 그것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클라이버 감독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선포하고자 합니다: “너희가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 통일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면 그것을 받으리라.”
2. 이는 메시야 예수님의 종 사도 바울에게서도 나타나는 진리였습니다. 사울이었던 그에게 유대 민족주의만이 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만나서 이방을 위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민족을 포기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메시야 예수님 안에서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의 성취를 보고 증언했고 탄식했습니다.
“내가 메시야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메시야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1-3)
사도 바울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유대 애국주의자였습니다. 자신 스스로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고백할 만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야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중심의 민족주의를 넘어 하나님 중심의 세계주의, 곧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파울루스 둘로스 예수 크리스투” 이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바울 종 메시야 예수의”입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으로 되어 있지요. 왜 사도는 자신을 큰 자인 사울에서 작은 자인 바울이라고 밝히면서, 스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자유인이면서도 종, 아니 노예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물론 그 당시 로마에는 황제와 로마인들의 노예들이 무수히 많이 살았습니다. 로마 황제의 노예와 메시야 예수님의 노예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사도의 답변은 로마서 6장 15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오?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5-23)
여러분,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 아니 이 지상의 제국, 이 세상 나라의 종들을 폭력혁명으로 해방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서처럼 수많은 노예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지상의 혁명도 능가할 수 없는 더 라디칼한 혁명,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 예수님의 종이 되는 길인 것이지요. 이는 죄와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근본적인 해방과 자유를 얻게 하는 메시야를 좇는 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거룩한 삶으로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의 삯인 사망을 메시야 예수님이 대신 치러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 곧 메시야 예수님 안에서 영생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우리가 본래 죄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메시야 예수의 종으로 자신을 부르면서 바로 그 다음 부분에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 하나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냥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했을까요? 왜냐하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거짓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앙게리온’이라는 그리스어는 로마시대에 로마 황제의 승전보를 알릴 때 주로 사용되던 말이기도 했습니다.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가 다스리는 곳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는, 곧 노예를 부리는 자유인들에게는 그 승전보가 복음, 곧 기쁜 소식이었겠지요. 하지만 국권을 잃고 영토를 빼앗겨 노예로 전락한 패배자들에게 그것은 악몽 그 자체, 곧 ‘디스앙게리온’ 나쁜 소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구태여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한 것은 메시야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갈3:28)임을, 곧 모두 같은 죄악의 사슬로부터의 자유와 영생의 복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 자의 부르심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메시야 예수님의 종의 삶, 곧 “메시야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입니다.(롬1:6)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회장에 떨어진 폭탄이라고 불렸던 책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에서 로마서 1:5-6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하나님 이름의 영예를 위하여, (구원의 복음 안에서 확증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복종하게 하는 은혜와 사도의 소임을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여러분 역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메시야 예수님의 부르심,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복종하게 하는 은혜와 사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그 부르심에 합당한 것이며, “메시야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입니까?(빌1:27)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유일하게 온전히 순종하신 메시야 예수님을 좇아 성도로 부르심 받은 자의 신실한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바울 자신!)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라.”(고전7:20-24, 29-31)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새겨야 하는 부분은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The time is short)라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메시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물론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도 바울의 강조점은 이미 부름받은 자의 삶이란 메시야적인 시간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또는 낭비하는, 시간이 내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예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마치 그 분이 여기 우리와 같이 계신 것처럼 종말론적인 긴박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히 오늘 새내기로 출발하시는 여러분! 메시야 예수님 안에서 부름받은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나라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의 멍에를 짊어지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유를 지키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메시야 예수님 안에서 부름받은 사명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시간은 더 이상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 예수님의 것이므로 그 분에게 드리십시오.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빌어 여러분 모두에게 권합니다. 이 말씀으로 여러분 나이의 한 방황하던 젊은이었던 성 어거스틴은 회심을 했습니다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메시야 예수님으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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