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15학년도 추수감사절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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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 등록일
- 2015-11-30 13: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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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이 살 길(히 10:19-25)
최근에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 르네 지라르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는 폭력의 문제를 모방욕구에서 비롯된 갈등에서 해석했습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세계 속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모방하려는 욕구 속에서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거대한 투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사회는 계속적인 투쟁 속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방식으로 교묘하게 갈등과 투쟁을 멈추고 해결 방안을 찾는데, 그것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만인에 의한 한 사람의 투쟁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양 이론인 것이죠. 희생양을 찾아내서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려함이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속되는 악순환이라고 지라르는 그의 연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지라르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제사의 악순환을 끊어버린 최후의 희생양,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 되셔서 최후의 희생제물로 바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감사함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 감사의 의미는 ‘유카리스트’, 성찬이라는 말에 담겨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와 함께 그 모든 것과 일용할 양식까지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사회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잡으려고 하는 이 악순환의 역사 속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인류를 그 제도적,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해방하시고 십자가로 모든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인류를 위해 “새로운 살 길”(히 10:20), 그 새로운 살 길을 여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위한 새로운 살 길 만이 아니라 감신을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살 길이 증언되어 있습니다. 19절에서 20절을 보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여신 새로운 살길. 성소로 통하는 그 살길을 담대히 우리가 들어갈 것을 권하고 있습니까? 본문 25절에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믿음의 공동체는 내우외환의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며, 심지어 예배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한다.”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예배에 불참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고의적으로 철폐하고, 고의적으로 공동체의 예배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 있어서도 용납 될 수 없는 신자들과 믿음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모이기를 폐하면 살 길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이야기하면, 모이기를 폐하고 살 길을 포기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칭송받는 아브라함 링컨이 1858년 6월 16일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아직 정치 초년병으로서 미국 일리노이 주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의 연설이었지만 그것은 후일에 링컨의 정치와 리더십에 방향타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당시 미국은 노예제 문제로 남부와 북부가 갈등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링컨은 마가복음 3장 23절 곧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다. ‘A house divided against itself Cannot stand.'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 'I believe this government cannot endure permanently half slave and half free.' 나는 미국 정부가 반은 노예를 지지하고, 반은 노예를 반대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I do not expect the union to be dissolved. I do not expect the house to fall. But I do expect it will cease to be divided.’ 나는 미합중국이 무너지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미국이 통합이 되어 하나가 될 것을 기대합니다. ‘ It will become all one thing or all the other. ’ 그런데 미국의 하나 됨은 이쪽 방향이든 저쪽 방향이든 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 Either the opponent of slavery will arrest the further spread of it, and place it where the public mind shall rest in the belief that it is in the course of ultimate extinction. ’ 한 방향은 노예제를 폐지하고 모든 국민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노예제는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악이라고 하는 것에 합의하고 하나로 미합중국에 남는 길입니다. ‘All its advocates will push it forward, till it shall become lawful in all the states, old as well as new - north as well as south ’ 그런데 그 반대편은 노예제를 지지하면서 미국의 북부든, 남부든 모든 주에서 노예제가 합법화 되어서 노예제를 합법화시키는 나라로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 링컨의 위대성은 노예해방이라고 하는 문명사적 난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와 반대하는 북부가 갈라져가지고 현상을 유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노예제 폐지를, 문명사적 과제를 해결하면서 미국의 분열을 극복하고 통합함으로, 하나 됨으로 모이기를 폐하지 아니하고 함께 모여서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룩하는 기초를 놓았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링컨의 위대한 통합의 정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성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 특히 감신의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분열, 곧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모이기를 힘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제아무리 서로가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배 공동체 앞에, 하나님 앞에 함께 나와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곳에 저를 위시해서 어느 누가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누가 누구의 피, 누구의 희생으로 이 공동체 안에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의 피, 오직 예수의 희생만이. 어느 누구를 희생양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를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의 성소로, 예배의 자리로, 하나 됨의 자리에로 나아갈 믿음의 담대함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신자들도 신령과 진정으로 참 예배의 자리로 담대히 들어가지 못하고 꺼려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느낀다거나 아니면 교우들과 함께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꺼려지거나 어떤 이유든지 간에 자격지심 속에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의 설교학 교수였고 지금 에모리 대학교의 설교학 교수로 있는 토마스 롱 교수가 히브리서 주석에서 이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의미 있기를, 다시 말해 받아들여질 만한 제물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우리의 제물이 거절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엉망이 되었을 때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도, 또는 한계에 도달할 정도로 베풀고 섬기며 선한 일을 할 때조차도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결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무언가를 할 수 없다. 충분히 성취할 수 없고, 충분히 줄 수도 없으며, 충분히 가질 수도 없고, 충분히 인정을 받지도 못한다. 우리 위에는 부모든, 교사든, 고용주든, 낯선 사람이든, 자신의 자아든 항상 누군가가 심판자로 서서 우리를 심판대로 내몰고, 우리의 노력이 불충분하다고 다그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제물을 인생의 제단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족하기만 하다.”(172-173)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느끼는 그런 감정을 잘 표현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업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열등감을 느끼고 패배감을 느끼지만, 그것에 휩싸이지만, 그러나 “예수의 피를 힘입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력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얻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히 10:21)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 감리교회를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감리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다스리시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는 담력을 얻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성찬의 테이블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단번에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복됨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았던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 예수님의 육체를 찢으셔서 그 육체를 통과해서, 찢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을 통해서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았던 장벽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셨던 예수의 그 은혜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입니다.(히 10:21)
여러분, 이제 저와 여러분은 더 이상 성소 밖에서 웅성거리고,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또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단한 번 들어가는 그런 유대인들의 습관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스스로 육체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 장벽과 그 휘장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 내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누구나가 주님 앞에 나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엡 2:14) 이것을 감사해야 돼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역경에서도, 어떠한 고민 속에서도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함께 나가게 되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 되고,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 길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길 뿐입니다. 본문은 그 살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첫째,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우리가 참 마음,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참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 공동체가 화합된 공동체로 회복이 되어 한 마음, 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 역시 우리 공로로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주장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업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 역시 예수님의 피로 뿌림 받아 우리가 정결케 되어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때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감신 공동체가 다시 초심을 회복하고 다시 예수의 복음의 정신을 회복하고 우리 모두가 참 마음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믿음을 가지세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벌하는 것이 아니라, 꾸짖는 것이 아니라 상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믿음 위에 단단히 서서 주님이 주신 소망을 굳게 잡읍시다.(히 12:23). 소망을 굳게 잡읍시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 10:23)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 믿는 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좋은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가지고 있는 주님 안에서 품은 소망과 비전이 무엇입니까?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가 가진 비전과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품은 비전과 소망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미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주님이 주신 이 비전과 소망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미쁘시기 때문에 세상은 변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영원하신, 미쁘신, 약속하신 것을 꼭 지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많은 혼란과 어지러움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지만 지금 우리는 캄캄해 보이는 상황 속에 놓여져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때 일수록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나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우리 공동체의 소망과 비전을 이루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우리는 믿음 위에 견고히 서서 우리로 하여금 품게 하신 비전과 소망을 굳게 잡고,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합시다. 존 웨슬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가 은혜 안에 굳게 세우신 자들에게라도 만일 그들이 성령 주시기를 모든 경우에 기도하되 한 번만 아니라 여러 번 구하지 않으면 성령을 주시는 일이 거의 없다.” 끈질기게 기도해야 된다는거에요. 끈질기게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까지, 성령으로 우리가 가득 찰 때까지 끈질기게 은혜 안에서 굳게 서서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을, 백 번을, 천 번을, 만 번을 기도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또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우리는 물러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빛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할 수 있으며, 그 후 결과의 성공 여부를 고심하지 않고 결단들을 내릴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완전, 125) 마음이 불안할 때, 마음이 울적할 때, 절망감이 있을 때, 물러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빛이 우리에게 비춰지게 되어서 우리가 어떤 결단을 앞두고 결과가 어떻게 될까 계산하지 아니하고 그 결과와 성공의 여부를 고심하지 아니하고 용기를 가지고 결단을 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이 세 번째, 서로 돌보고 격려하고 권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이 어려울수록 교회가 어려울수록, 우리 공동체가 어려울수록, 민족과 국가가 어려울수록, 이 세상이 어려울수록 이기주의에 빠지기가 쉬워요. 흩어지기가 쉬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반대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며 서로 권하라.’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자신과 공동체의 소망을 굳게 붙잡은 자와 그 공동체는 이기적이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를 만날수록,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합시다. 더 이상 서로를 정죄하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고소 고발하고, 무시하지 맙시다. 도리어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이해하며, 상대방의 소리를 경청하고, 격려하기 위해 함께 모이고, 만나고, 대화를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서로 만나서, 모여서, 대화하는 것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권면하고 우리가 함께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면서 포기하지 말고 전진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F)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주님의 날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투쟁이 극에 달했을 때, 여러분이 잘 아는 데스몬 투투 대주교는 핍박받고 신음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역사의 마지막 챕터를, 마지막 장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성경책의 끝에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승리할거에요. 세상이 우리를 조롱할지라도, 마귀가 우리를 비웃을지라도 여러분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승리할 것이에요. “그 날이 가까움을 볼 수”있는 믿음의 눈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욱더 서로를 돌보고 격려하고 권면하면서 함께 모이기를 힘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돼요. 학생도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돼요. 교수도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돼요. 희생양으로 최후의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하나 되어, 모두 치유되고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두가 승리하는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살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우리 모두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아무리 우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소망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이제 곧 우리에게 승리와 회복을 주실 주님을 고대하면서 서로를 돌보고, 격려하며, 권면하면서 하나님께로 담대히 나아갑시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러 담대히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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