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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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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2015년 2학기 종강예배 설교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12-07 13:30:13
조회수
6614
첨부파일

151124 종강채플 최종주자의 자격.hwp

최종주자의 자격

(12:1-3)

 

 

이번 주일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 마지막 주일이면서 왕국주일, kingdom tied,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축하하는 왕국주일입니다. 왕국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 되심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모든 지향이 그분께 복종시키도록 하기 위한 주일인 것입니다. 우리 감신대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올림픽 경기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육상경기입니다. 개막식 때에는 올림픽 경기의 발원지 아테네에서부터 성화를 채화해서 온 세계를 거쳐 개최국의 모든 지방을 거쳐서 드디어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섭니다. 또 폐막식 때 이 마라톤 경기는 마지막으로 경기가 되는데, 올림픽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는 사람은 맨 먼저 들어오는 선수입니다. 그런데 개막식 성화 봉송 때에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성화의 마지막 주자, 그가 누구일까에 쏠리는 것입니다. 대체로 성화 봉송 최종주자는 개최국의 스포츠역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영웅을 세우는 사람이 일반적입니다. 빨리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젊은 사람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그 시대를 상징하는 그 시대의 최종주자를 우리는 올림픽의 영웅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 최종주자의 자격에 대한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학기동안, 아니 긴 시간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 최종주자의 자리에 서 계십니다. 히브리서 121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육상경기장에 막 들어선 선수 같습니다. 이미 경기장 안에는 경기를 관람하려고 관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본문 앞에 있는 11, 우리가 보통 믿음 장이라고 부르는 그 장에 우리 믿음의 허다한 선조들, 믿음의 증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데, 그분들을 염두하고 쓴 글인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 시대에 믿음의 경주자들이었습니다. 아니, 그 시대에 있어서는 최종주자들이셨습니다. 아벨로부터 에녹, 노아 때로부터 아브라함과 사라를 거쳐서 모세에 이르는, 더 나아가 기생 라합과 사사 기드온으로부터 다윗과 사무엘에 이르는, 또 수많은 예언자들과 그 밖의 여러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분들의 이름들이 믿음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구름 같은 증인이 되어 관중석에서 저와 여러분의 최종경기를 바라보고 최종 주자, 이 시대의 최종주자가 어떻게 달릴 것인가를 관심하면서 격려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믿음의 경주를 할 때가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위하여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믿음의 경주자 자신이 그 시대의 최종 주자라고 하는 생각을,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최종주자로써 이제 막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서 출발선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 것은 모든 무거운 것, 거리끼는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에 제일 문제와 장애가 되는 것은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갈고리 같은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최종주자의 자격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죄는 물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유혹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떨쳐버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신학도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등지고 주님을 향하여 무거운 것, 유혹하는 것, 얽매이기 쉬운 것을 떨쳐버리고, 영혼의 겸손한 자세로 출발선에 서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 이게 무거운 죄요, 무서운 잘못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37절 이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불순종한 것이 죄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격노하게 함으로 광야에서 시체로 엎드러진 범죄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믿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믿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자들이라고 그렇게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이 세상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백성들인 우리의 죄,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하지 않고 순종하는 척 하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는 이 두 죄는 사실 하나의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자는 불신앙의 무거운 것과 불순종의 얽매이기 쉬운 죄를 훌훌 벗어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24절에 보면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를 벗어버리는 것을 죄와 싸우는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달리기시합이 아니라 경기 종목이 좀 다릅니다. ‘죄와 싸운다.’ 권투하고 레슬링 하는 그런 격투기를 연상시킵니다. 히브리서 1032절에도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당했던 박해와 핍박의 상황을 가르쳐 줍니다. 같은 장 33절에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그들은 갇힌 자를 동정하고 그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기쁘게 생각했던 초대교회의 신앙인들. 바로 그것이 그들이 이 세상의 죄악과 싸웠던 고난의 큰 싸움이며 불순종과 불신앙에 싸웠던 치열한 전투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124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죄악과 싸우면서, 마귀와 싸우면서, 피 흘리기까지,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교하기까지 아직은 싸우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믿음 때문에 당하는 박해와 고난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비방거리가 되고 감옥에 갇힌 정도가 아니라 고문당하고 심지어는 순교당하는, 그러한 상황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경주장의 출발선에 선 여러분들은 결단해야 합니다. 앞을 향해 달려 구원의 큰 상을 받을 것인가,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워 뒤로 물러서 멸망의 길에 빠질 것인가. 무거운 죄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두 번째 믿음의 주자의 최종자격은 인내로써 경주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일단 믿음의 경주가 시작되면 그것은 단거리 경기가 아니라 마라톤 같은 장거리 경기라는 것입니다. 짧은 거리라면 단시간만 견디면 되지만, 장거리는 큰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 역시 금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장기간의 인내의 훈련이, 참을성 있는 훈련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11절에서는 인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22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슈퍼맨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같은 육신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를 참아야 하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123절에서는 예수님이 죄인들의 고약한 일을 참으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배반했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침 뱉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역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온갖 수치와 모욕을 참아내시면서 그 끔찍한 십자가를 인내하셨습니다.

125-11절은 인내를 믿음의 경주자들에 대한 훈련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discipline이고 우리 말 번역에는징계라고 되어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징계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훈련이라고 하면 다른 뉘앙스가 있습니다. 원문 표현을 보니까 파이데이아스 큐리우”,‘주님의 교육이라고 되어 있고, 좀 더 정확하게 보면 파이데이아라는 희랍어는 교육훈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징계에도 이 의미가 들어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교육과 훈련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주님처럼 십자가의 승리를 위해서 용감하게 앞을 향하여 달려 나가게 하기 위한 교육 훈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잠언 311-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를 훈육하는 것. 만약 아버지가 훈육을 하지 않으면 그 아들은 사생자입니다. 진짜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Spare the rod, spoil the child.’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꾸지람과 채찍질이라고 표현된 하나님의 교육 훈련은 신앙의 경주를 위해 매우 필수적인 훈련으로써 매우 중요한 교육목적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9-11절에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한 교육목적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927절에서 믿음의 경주를 말씀하시면서 상을 받기 위해 달음질 하면서 모든 일에 절제하고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허공을 치는 것 같지 아니하며 도리어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주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주님의 교육 훈련을 달게 받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부여잡고 내 몸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한다.” 우리를 복종하게 하기 위한, 불순종의 의지를 꺾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기 위한, 왕 되신 주님을 높이기 위한, 나를 낮추기 위한 교육목적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교육훈련 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 곧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0-14절에서 보아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의 제사 드리심으로 온전한 거룩함을 영원히 얻게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함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과정에서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하신대로 거룩하게 되어가는,‘성화되어가는 훈련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세 번째 교육 훈련의 목적은, 연단을 통해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육훈련의 최종적 목적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샬롬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멸망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의로운 자, 하나님의 의인으로 삼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 인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4절에서도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귀한 열매를 맺고 싶으십니까? 주님의 교육훈련을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의 꾸짖으심을 달게 받으셔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의 채찍질을 감사함으로 받아야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미워하셔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안타깝게 바라보시고 바로 세우시기 위해서 훈련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경주의 최종주자 세 번째 자격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경주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우리 인생행로에 있어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믿음의 창시자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믿음을 완성하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가 가야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앞서 달린 분이십니다. 선두주자에요. 영어로 forerunner, 희랍어로는 프로드로머스’, 앞서 달린 자.

히브리서 619-20절에 보니까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가신, 앞서 달려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우리 주님께서 믿음의 경주에서 앞서가셔서, 앞서 달려가셔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고 자기 육체를 찢으시고 하나님 나라 보좌 앞으로 먼저 앞서 나가셔서 상을 먼저 받으시고 이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너희들도 나를 향해 달려오라고 손짓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바라보고 달려갈 영혼의 닻이라고 했습니다.

‘anchor’영혼의 닻, ‘anchor’여러분 방송에서 방송을 주관하는 사람을 anchor woman, anchor man이라고 하죠? 닻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앵커라는 영어 단어를 찾아보면이라는 말도 있고 뉴스, 미디어의 방송을 주관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고,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최종주자라는 의미가 있어요. 주님은 무엇이냐? 어떤 분이시냐? 우리가 앞서 달려가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제 주님께서 또한 최종주자가 되셔서, anchor가 되셔서, 소망의 닻이 되셔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달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달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도 그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212-17절에 보니까 믿음의 경주의 최종주자의 길과 그것과 그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자의 길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서는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에 나오는 두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를 빗대어 적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에서 야곱은 정말 어떻게 보면 너무 영리하고 때로는 너무 교활하기까지 한 잘못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셨을 때 하나님이 그를 교육훈련 하셨을 때 저항하지 아니하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갔어요. 에서는 관대한 사람, 호쾌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 마음속에 불신앙과 불순종의 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육훈련을 달게 받지 아니하고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렸어요.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렸어요. 그는 징계가 아니라 심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던가, 아니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에서 같이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심판 당하는가. 둘 중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야곱이 어떤 인물입니까?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창세기 479절에 보니까 야곱이 야곱의 나이를 묻는 바로 왕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내 나그네길 세월이 130년입니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정말 험악하지 않습니까? 21세기라 험악한 것이 아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생은 험악한 세월입니다. “목회자들의 경우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도 않고 돌아서는 이들을 섬기느라고 지치고, 교회학교를 운영하느라 지치고, 쇼핑하듯이 교회를 둘러보러 온 이들을 심방하느라고 지치고, 다 때려 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느라 지치지 않습니까? 참으로 힘든 세월이죠. 평신도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평생의 삶을 연보궤에 쏟아 부었지만 정작 아무 복도 받지 못한 이들. 온통 상처투성이일 뿐 아무 소망도 갖지 못한 이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이 고통의 세상이 간밤에 없어지지 않았다고 느끼는 이들, 그리고 새날을 살아갈 힘을 잃은 채 그저 맥 빠진 손목과 연약한 무릎으로 또다시 떠오른 태양을 애써 맞이해야 하는 이들.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토마스 롱)

그러나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12절에 보면 이러한 사람들, 바로 우리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최종 경주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손목이 발목이 휘둘려도 곧은길을 만들어서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지난 10월에 미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톰 행크스 라고 하는 유명한 배우와 함께 만든 영화, 우리말로 스파이 브릿지’, 영어 제목으로는 ‘Bridge of Spies’, ‘스파이들의 다리라고 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가지고 만든 작품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으로 핵전쟁의 공포가 최고조에 도달했던 1957, 제임스 도노반이라고 하는 변호사가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적국의 스파이를 변호한다는 것은 자기의 목숨은 물론이고 가족의 안전까지 위협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노반은 변론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라고 하는 미국의 헌법 정신과 성경의 정신, 착실한 기독교인으로써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따라 아벨의 변호에 최선을 다합니다. 변호사 도노반에게 소련 스파이 아벨은 자신이 어렸을 때 국경 수비대원들에게 부모님과 부모님의 한 친구가 반복적으로 두들겨 맞았던 얘기를 들려줍니다.“매번 국경 수비위원들이 칠 때마다 저희 부모님의 그 친구 분은 다시 일어섰지요. 그들이 더 세게 때립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자기 발로 일어섰어요.”그러자 도노반 변호사가 아벨에게 묻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그를 상기시킨단 말이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벨이 짤막하게 답합니다. 영어로 “standing man” 우리말로 표현해서 일어서는 사람일어서는 사람, 두들겨 맞아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 포기하지 않는 사람, 낙심하지 않는 사람, 다시 일어서는 사람. 히브리서 11장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 고난과 역경과 고문과 온갖 박해와 심지어 순교의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사람들을, 'standing man'들을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standing man, standing woman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12-13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위대한 standing man, 구약 성경의 야곱과 같은 인물,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 환도뼈가 부러져도 절뚝거리며 다시 일어서서 나아갔던 야곱과도 같이 하나님의 교육 훈련을 감내하는 그리스도인, 믿음의 경주의 최종주자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

 

여러분 일 년 동안 얼마나 힘드셨어요? 이번 학기 얼마나 어려우셨습니까? 특별히 우리 신입생, 1학년 학생들 너무나 힘드셨죠? 여러분을 생각하며 저는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저들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이 시대의 최종주자들로 주님 세워 주옵소서. 오늘의 하나님이 주시는 교육훈련이 우리에게 저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슬픔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상황인데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자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여기서 곧은길을 만들라고 하는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길을 좇아가는 것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끝까지 정도를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시편 119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을 달려 가리이다.”그렇습니다. 이 시대에 바로 여러분들이야말로 믿음의 경주의 최종주자들입니다. 우리를 앞서간 믿음의 선조들,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히브리서 1139절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고 여러분이 아니면 그들도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최종 경주자의 길을 포기하면 하나님이 지금 이 역사를 이끌어 온 구원의 역사의 목적이 달성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첫째, 믿음의 경주의 최종 주자들이여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기 쉬운 죄들을 벗어 버리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꾸지람과 채찍질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로 인한 교육훈련으로 믿으시고 인내로써 여러분 앞에 놓인 경주를 담대하게, 담대하게 치르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언제나 곧은 길, 하나님 말씀의 정도에 서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감신대에 넘치시기를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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