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2016년 3월 2일 개강예배
-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6-07-29 1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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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일 개강예배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라
이사야 1장4절 ~ 10절
2016학년도에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한 225명의 학부생들과 258명의 대학원 학생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적으로 커다란 위기가 증대하고 있는 상황에 여러분은 처해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는 1887년에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신학교로서 학생의 수로써도 세계 감리교에서 크고 왕성한 학교이며 내년이면 개교 130주년이 됩니다. 어제는 삼일절 기념식을 하고 우리 민족이 태극기를 걸며 97년 전 삼일절을 회고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대학원 로비에 가면 민족 대표 33인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들 중에 7명이 우리 감리교신학대학교 졸업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시고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감신대의 사명은 교가에 있는 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투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의 투사를 필요로 합니다. 신학교의 사명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각 시대마다 배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과 교회는 거대한 폭풍 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 폭풍의 역사 한가운데서 진정 필요한 것은 이 폭풍마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을 본문 말씀을 통하여 이 시대의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예언자들 중 한명인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습을 그려줍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라고 시작합니다. 예언자의 특징은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이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예언자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점에서 예언자는 시인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그냥 지나 칠 수 있는 범상한 일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뛰어난 상상력으로 새로운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윌터 부르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 “the prophetic imagination” 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는 20대의 젊은이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말씀이 임했을 때 구체적인 시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몬의 아들 유다왕 요시야가 다스린지 십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1:2) 2016년 대한민국이 이렇게 여기 존재하는 이 시기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부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예언자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지닌 청년 예레미야는 렘 1장11절~ 19절을 보면 놀라운 환상과 비전을 체험했습니다.
첫째 환상은 살구나무 가지를 본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살구나무라는 말과 하나님 말씀이 지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의 음이 비슷합니다. 이는 일종의 전조(前兆) 징조, 곧 분명 일어날 일에 대한 징조입니다.
둘째 환상은 끓는 가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펄펄 끓는 가마의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이 환상은 젊은 예레미야를 몸서리치게 전율하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재앙이 북방에서부터 일어날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린 민족에 대한 심판이며 징계였습니다. 모든 국제 정세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감신대 신학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시대의 젊은 예언자로서 부름 받았다면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불러일으키시는 영감과 감동이 있습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다는 것은 예레미야처럼 이 사태를 한반도의 상황에서 살구나무가지의 환상과 끓는 가마에 대한 환상을 공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광야에 소리치며 굽은 길 곧게 하니 그 이름은 예언자 그 이름은 예언자 부름받은 젊은이들 그 몸 드려 단련하는 감리교 신학대학 감리교 신학대학” (교가 1절)
저는 20대 중반에 서부전선에서 철책선을 지키는 부대에서 사병으로 매일 북한군과 대치 상태에서 2년 이상을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화려하고 편안한 도시 생활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황량한 광야의 삶이 어떤지를 절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은 이렇게 분단되어 서로 전쟁을 하고 여전히 갈등하며 지금까지도 화해와 평화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는가? 이 의문은 제가 20대였을 때나 60대인 지금이나 여전히 남아있는 생애 최대의 고민입니다. 제 박사학위 논문부터 여러 저술과 논문들이 집중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분단극복과 화해해서 하나님 안에서 상생을 길을 복음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우리가 그 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20대였을 때도, 여러분이 20대인 지금 도 한반도의 상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최근에는 최악의 상태로 가지 갈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해외 동포나 해외 사람들은 한국을 바라보며 전쟁의 발발의 긴장 상태에 대해서 많이 우려를 하는 가운데 한국인들의 무감각한 태도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우리의 영적 정신적 사상적 신경세포가 마비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인들은 너무나 많은 고통과 갈등과 공포와 같은 분단의 상황에 노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위험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우리가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신학도가 젊은 예언자로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없다면 이미 그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영혼의 쿨쿨 잠자고 있는 것이므로 깨어나야 합니다.
젊은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이 임하여 충격적인 환상을 보았을 때, 북쪽에서부터 끓는 가마를 바벨론으로 바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징계로 하나님의 경고로 바라본 것처럼 우리도 젊은 예언자들로서 그러한 영적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 놀라운 환상을 보았을 때에 그리고 예레미야 6장에서 예레미야는 환청을 듣습니다. 나팔 소리와 전쟁의 소리가 들리는 그 때에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예레미야는 1차적으로 물론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두려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본문 1장 6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슬퍼했다고 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 특히 예레미야서 전체를 관통하는 슬픔과 애통은 매주 격렬하고 열정적인 슬픔과 고통의 ‘파토스’(pathos)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 ‘무감각’(apathy)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슬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란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져 신음하는 자기 백성을 바라보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말씀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 심정을 절실하게 느끼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젊은 예언자인 나를 향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지 알도록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울고 주님과 함께 슬퍼하게 하시고 주님과 함께 애통하게 도와주시고 주님과 함께 이 민족을 위하여 사랑할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을 회복 시켜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애굽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고 절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세워 저들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야 합니다. 이곳과 동족의 아픔과 신음 소리를 듣고도 무감각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면 예언자적 열정과 감수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슬픔과 애통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예언자적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본문 6절에서 예레미야는 자기가 아이라 말할 줄로 알지 못하기에 슬프다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것도 매우 정직하고 솔직한 고백입니다. 아이와 어른의 근본적인 차이 중의 하나는 말에 있습니다. 말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지성과 의지를 표현하고 관철하는 성숙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정작 예레미야는 말할 줄 모른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레미야가 말할 줄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처럼 탁월한 지성과 탁월한 영적 감수성을 가지고 예언의 말씀이 듣는 사람들의 심령을 후벼 파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는 말할 줄 모른다 했나요? 단순히 겸손의 표시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오늘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예레미야가 자신이 말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슬퍼한 것도 근본적으로 자신을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는 아이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말할 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슬픔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20대 젊은이 예언자적 감수성을 가지고 오늘 이곳에 예레미야처럼 온 여러분들은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깨닫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대학에, 신학대학도 포함하여 진학하게 되면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심지어 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민족 앞에서 역사 앞에서 학문 앞에서 진리 앞에서 홀로 설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발달과정에서 이러한 단계를 ‘인습적 신앙-습관적 신앙’에서 ‘개별적 신앙-홀로서기 신앙’으로의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대학에서 공부할 다양한 인문학적 과정과 학문의 기초가 되는 연구를 통해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시대에 새로운 부름과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위기 속에서 새로운 지성과 새로운 예언자와 새로운 목회자와 새로운 사역자를 요청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판적 사고와 지성이 없이는 예언자로서의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와 이 교회와 이 사회 이 민족과 이 세계에 대한 바른 하나님의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대안적 공동체를 꿈과 상상력을 꿀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여러분 개인과 가족,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의 울타리에서 살았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은 우리 사회의 더 큰 영역과 민족 역사와 세계사의 더 큰 문제를 심각하게 공부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슬픔의 폭이 여러분 개인과 가족, 최고 가까운 지인들의 관계에 그쳤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의 슬픔의 폭은 우리 사회의 불행한 이웃과 민족의 분단의 비극, 그리고 생명의 전면적 위기 속에 놓인 지구촌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학도의 사명입니다.
손정도 목사님은 우리 감리교신학교 3회 졸업생이고 정동교회 4대 목사님이셨습니다. 임시정부의 국회의장도 하셨습니다. 3·1운동 때에 민족 운동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사셨던 분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만주에서 일재의 압제를 피해서 있을 때에 그 곳에서 목회하시면서 민족을 위해서 헌신하시다가 일제 경찰에 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시며 순교순국하신 분이 우리 학교의 선배님입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고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한 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김일성이 중학생 때에 손정도 목사님의 교회에 다녔고, 세례 받았고 그분을 아버지처럼 따랐기 때문입니다.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하여서 중국 경찰에 붙잡혀 고문 받아 죽게 되었을 때에 손정도 목사님이 그를 여러 번 빼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당시 민족을 위한, 나라를 위한 과제는 민족 독립과 해방이었습니다. 지금은 화해와 통일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나라 사랑을 위해서 일했을 때 일본경찰이 고문을 얼마나 지독하게 했겠습니까. 밤새도록 고문을 당하시고, ‘내 생명줄이 가물가물하다. 아직 안 죽었구나.’ 할 때 새벽녘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손정도 목사님이 고백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2000만 동포들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배고픈 모습으로, 피 흘리는 모습으로. 우리 2000만 동포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손정도 목사님은 “나는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주여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애통하시며 민족을 위해 우시면서 다시 일어서겠다고 할 때 그의 앞에 그 새벽녘에 감옥의 창가로부터 빛이 비춰 들어왔습니다.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터치가 있었습니다. 손정도 목사님은 고문당한 그 몸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손정도 목사님의 그 예언자적인 열정과 그 슬픔과 그 애통함의 민족에 대한 사랑과 남북을 아우를 수 있는 그 존경받는 위대한 꿈을 꾸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신입생 중에는 어렸을 때 탈북하여 청소년기를 대한민국에서 보내고 우수한 대학을 졸업한 후, 북한 복음화와 민족 통일의 큰 꿈을 안고 대학원에 입학한 두 분이 있습니다. 또 아프리카 케냐에서 오신 두 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 세상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는 삶을 위해 이 먼 한국까지 가족을 떠나오신 분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여러분은 스스로를 아이라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또 그렇게 행동하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당당한 예언자로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모태에 짓기 전에 알았고 성별하였고” “여러분을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렘 1:5)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다는 것은 여러분이 글로벌 시대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계적 사역자의 꿈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좁은 울타리에 갇히지 말고,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원칙과 양심에 입각하여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학문적인 정직성이 필요합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은 학문적 정직성을 버리고 남의 지식을 훔치는 표절을 십계명 중에서 제 8, 9, 10계명을 어긴 죄라고 규명했습니다. 신앙적인 진실성이 필요합니다. 세상 정치와 선거에서도 금하는 금권선거가 감리교회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가 존 후스는 금권선거와 같은 성직매매를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시는 제일 악한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더 이상 아이로 말하지 말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렘 1:10) 불의와 부정, 거짓과 부패는 철저히 뿌리 뽑고 파괴하며 넘어뜨려야 합니다. 정의와 진실, 공의와 원칙은 철저히 건설하고 심어야 합니다. 우리 감신대부터 그리해야 합니다.
1774년 웨슬리 목사님도 첫 런던 연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리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것을, 새로운 종파를 일으킴이 아니라, 교회와 특히 민족을 개학하고 성경적 거룩함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빗대어 하나님께서 감신대와 여러분을 세우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민족을 개혁하고 성경적 거룩함을 온 땅에 전파하며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손을 여러분의 입술에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너를 구원하리라”(렘 1: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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