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땅 끝까지"-2024학년도 가을학기 종강예배
- 작성자
- 부속실
- 등록일
- 2024-12-03 20:56:39
-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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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까지”
2024.12.03.
2024학년도 가을학기 종강 예배
말씀: 사도행전 1:8
설교자: 유경동 총장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는 추수의 계절에 사도행전 1장 8절을 통하여 ‘땅 끝까지’라는 주제를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총장의 직무를 수행하며 지난 9개월 동안 많은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울릉도, 독도 순례, 영종도, 제주도 동문 방문,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마지막 발자취로 기억되는 어청도, 백령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 방문, 네팔의 히말라야 등 이렇게 ‘땅 끝’이라고 불릴만한 곳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는 예루살렘, 유대 등 당시의 로마를 넘어선 곳들을 우리가 지리적으로 이해할 때 ‘땅 끝’이라고 표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적으로는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특별히 내년은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님은 1885년 4월 5일 드류 대학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인천에 상륙해 정동제일교회, 내리교회 등에서 복음의 흔적을 새기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초대 학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 감리교 역사에 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그분에게 조선이라는 곳은 그야말로 ‘땅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과 헌신의 선교에 어느덧 감리교신학대학교 또한 137년을 맞이했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종교, 특별히 감리교에 속한 사학이지만 한국 역사 속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7인을 배출한 학교, 최초로 남성과 여성의 차별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초의 남녀공학, 최초의 신학대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은 민족과 세계를 위해 현재도 세계의 땅 끝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세계는 더욱 넓어졌고, 이제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땅 끝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세계는 이 이상 넓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땅의 기본적인 속성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의와 식과 주를 해결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과거부터 땅은 수많은 전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이 ‘땅 끝’을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먼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땅은 이와 같이 ‘소유’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이 의미로부터 벗어날 때 땅은 세 가지 의미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첫째, 땅은 인간을 말합니다. 창세기 2:7을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번제나 화제를 드릴 때 그 위에 흙을 먼저 깔아놓습니다. 이는 인간을 먼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이처럼 신앙적으로 볼 때 땅 끝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 정복해야할 것, 나의 이익이 아닌 ‘인간 자체’를 의미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나는 하나님 앞에선 흙덩어리”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 흙에 하나님이 불어넣어주신 생기와 그분의 형상을 따라 빚어진 손길이 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10:39을 보면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땅의 의미가 사람이라고 한다면 땅의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대학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1:9의 말씀처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인 것입니다. 이 시대는 사람을 수단과 소유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해하는 ‘땅 끝’은 인간의 결국,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나아가 우리 곁의 수많은 생명들을 기억하며 함께 구원으로 나아가라는 사명을 받은 여러분이 감리교신학대학교로의 부름 받은 진정한 목적입니다.
두 번째, 문자적으로 땅 끝에서 ‘끝’은 인간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아오며 절망과 낙담의 ‘끝’을 수없이 경험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8을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분명한 것은 ‘끝’은 우리의 마지막이 아닌 우리의 삶의 끝자락에서는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3:14을 보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시다는 것은 여러분을 견고하게 지키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함께 앉은 옆 사람을 보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공부하는 학우를 보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끝은 인간의 한계가 아닌 믿음의 시작입니다.
마지막으로 ‘땅 끝’은 신비와 영원한 세계를 말합니다. 히브리서 11:8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아갈 그 땅의 끝을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신비와 미지와 불확실한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의 계획대로, 나아가야할 명확한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치밀하게 계획할지라도 우리라는 한계에 국한된 인간적인 계획입니다. 그러나 ‘땅 끝’이라는 믿음의 세계는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없는 곳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부르심에 따라 가야하는 곳입니다.
저 또한 여전히 이 말씀을 마주할 때에 매번 실패하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언제나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경계와 조건을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 틀에 맞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교만함을 돌아보기보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황합니다. 그 방황의 끝자락에서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가 누구인지를, 너가 나아가야하는 끝이 어딘지를 생각해라’ 주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믿음은 시작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세상 모든 영혼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땅 끝’의 의미가 된다면 적어도 세 가지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게 됩니다. 첫 번째, 땅이 우리 몸이라고 한다면 고린도후서 6:16의 말씀처럼 우리의 몸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우리의 몸, 이것이 새롭게 이해되는 땅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 주님은 땅에 있는 무리를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마가복음11:17을 보면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비롯하여 교회라는 터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땅의 진정한 의미를 기억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땅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속한 무리들이 모여 교회를 세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가 되게 하고 우리는 지체로서 한 몸이 되는 것을 기억하는 신앙의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1:22을 보면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을 향한 성전이 우리가 향해야할 곳, 바로 ‘영원’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언제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최후의 성전,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의 성전 그 ‘영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향해야 할 ‘끝’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끝’이 아닌 ‘영원’을 향한 끝을 향해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사명을 기꺼이 감당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의 여정을 걷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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