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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작성자
김인찬
등록일
2007-03-17 00:00:00
조회수
855
첨부파일
  

**[요한복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두 번째 글도 연속해서 이어집니다.(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찾아갔다는 것)


다음 까페 호산나 마을( cafe.daum.net/hosannakim )에서 제공합니다.

제 글은 얼마든지 퍼 가셔도 됩니다. 문법에 문제가 있으면 살짝 고쳐도 상관없습니다.


[내용]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보다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공관복음에 대한 신학적인 내용이 좀더 추가된 것이다. 그 내용은 공관복음의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온 참 목적을 신학적으로 조명하려고 기록된 것이다. 그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요한은 예수의 신성을 먼저 강조하면서 그 책을 시작한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첫 시작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이 땅에 오게 된 참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자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죽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하려고 전개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와 유대인의 관계는 공관복음과 같이 대립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예수는 진리를 말하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정반대로 예수를 죽이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대립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가 그들의 불신앙에 의해서 죽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공관복음과 같이 요한복음도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죽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지 구체적으로 공관복음서의 숨은 의도를 모두 다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 간다는 것이다.(목적을 향해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전반부의 특징이라면 후반부는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밝히는 동시에 예수가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확실히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 증거를 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하나님을 아버지로 밝히심)


어두운 영적상태인 유대인들과 하나님의 아들로써 충돌하는 이 장면은 마치 모세를 따르는 자와 예수의 충돌이었다. 즉 율법과 은혜로 구분된다. 특히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미쳤다고 주장)


우리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모두 소유하고 있어도 예수의 참 의도를 분명히 찾지 못하는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 의도를 찾아가는 것은 믿음이 반듯이 요구된다. 오늘날도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의 참 목적을 알고 그리스도를 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2000년의 기독교는 예수의 행적을 다루는 책들을 하나의 이야기책으로 설명하고 또 그렇게 가르쳤다. 예수가 사역할 당시의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어렵지 않게 예수의 참 목적과 의도를 충분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증거 할 책을 서술하지 않았던 것이다.(사복음서외)


그러나 수백 년도 채 못가서 예수의 참 의도를 사복음서에서 찾아내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으며 교회는 결국 세상으로 달려가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교황정치) 마치 불신자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와 비슷한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초대교회(1세기 말~) 당시에 살았던 자들은 요한복음 14장의 내용이 예수의 죽음을 바로 앞두고 있었던 내용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때에는 요한이 살아있었고 제자들의 속 사도들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예수의 사역과 그 책의 의도를 찾아가는 시각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그러한 숨은 의도를 좀더 상세하게 기록된 책들이 더 많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자의적인 해석이 교회에서 편만하게 진행되었다. 사복음서와 상관없이 전혀 다른 해석을 하거나 혹은 사복음서를 신학에 이용하는 도구로 삼아 왔던 것이다.


그 한 예로 베드로의 고백을 가지고 수백 년도 되지 않았던 교회는 심각하게 우상화 작업으로 나아간다. 결과는 베드로를 교회의 교황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베드로가 죽은 후 적어도 150년까지는 아마 그런 작업을 못했을 것이다.(고난의 시대)


왜냐하면 베드로와 함께 살았던 2세들이 있었고 베드로의 고백의 의미를 과장하거나 베드로를 숭배하는 단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이다. 마리아가 살았던 당시에는 마리아를 누구도 숭배할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점점 세속화의 길로 들어간다.(시간이 흐르면서 우상화 됨)


이런 세속화의 작업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이고 시간적으로 동떨어진 이시대의 교회가 사복음서를 접하게 된다면 모호한 책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도 복음서를 해석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도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예수가 죽은 후 100년 안에 사도들과 속 사도들에 의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내용을 시간이 가면서 교회는 2000년 전 예수의 숨은 의도를 거의 잃어버리는 큰 손실을 가져왔다. 만약에 초대교회 이후 공관복음이 충분히 재대로 재해석되었더라면 교회는 세속화의 길로 그리 쉽게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교회의 세속화의 속도는 점점 가속화 되어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중세 암흑시대) 종교개혁 이후에도 초대교회와 동떨어진 시대였기 때문에 성경을 깊이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던 것이다.(카톨릭은 복음을 알지 못했음) 결국 개혁의 내용은 단순한 믿음으로 구원 얻는 다는 기초지식으로만 출발한다.(카톨릭의 철학적 교리신학은 수용)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졌으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로 개혁을 하였겠는가? 그 만큼 교회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카톨릭의 타락의 깊이는 이방의 종교와 같이 되었고 그러한 곳에서 진리를 다시 찾아가기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약 500년이 흐른 현대교회는 그 의미를 이제 초대교회로 조금씩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교리적인 논쟁의 시간은 이제 500년으로 족하다. 결국 교회는 이렇게 과도한 시간을 허비한 결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초대교회가 약 500년 동안에 심각하게 타락해서 이방의 종교가 되었다면 개신교는 약 500년 동안에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을 조금씩 전개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 너무 긴 세월을 교회는 소모했던 것이다.

그 시간이 약 2000년이라면 얼마나 교회는 세상과 밀접하게 붙어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과거 우리의 모태였던 카톨릭을 이방의 종교로 우리가 부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만큼 교회는 세상에서 온갖 죄를 지었고 극과 극을 넘나들었다.

이제 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000년의 긴 세월동안 성경이 밝히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매우 약했던 이유이다. 종교개혁에 의해서 교리로 말미암아 교회는 교리로 시작해서 성경을 참고서로 삼고 교리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교파 태동의 원인)


이제 교회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에 가장 큰 선물을 주셨다.

그 보이는 선물은 성경이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책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한 성경의 내용이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자체를 우상화한 과거 카톨릭이나 오늘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제 교회는 긴 세월동안 잃어버린 것을 찾는 초대교회 신앙운동이 있어야한다.

먼저는 성경을 깊이 밝히는 폭발적인 노력이다. 이것은 모두가 이 열정에 사로잡혀야 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유희문화에 사로잡혀 마치 세상의 종교인들과 같은 만족감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종교 활동)


이들에게 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하는 말씀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성경을 모르고 찬양 1000년 동안 1000번 부르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성경을 등한히 하고 우리는 무엇으로 더 큰 만족을 얻으려는 것인가?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해서 찬송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성경 그것은 충분히 미쳐볼 만한 내용이다.

그 안에 영생이라는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서 일하신 그 모든 일들을 우리가 알아가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주를 위해서 주와 함께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고 그 안에서 자라가는 것뿐이다.


세상에서는 도를 깨닫게 되면 오늘 죽어도 좋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혼자 깨닫고 혼자 죽는 종교가 결코 아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리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큰 문제는 살아가는 동안 주를 위해서 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은 지금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 절대로 아니다.


현대 교회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없이 가난해지는 교회와 성경을 알고자 하는 성도들의 열정과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이다. 그럼 어떻게 초대교회와 같이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가야 하는가?


첫째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첫 출발은 성경을 깊이 알도록 모든 신학과 지식을 전면 개방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 성도들은 그 지역의 교회에서 하나로 모이는 것이 초대교회와 같이 참 교회의 모습이다. 갈라진 것은 예수도 바울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제 갈라진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두 번째로 중대한 일이다.


세 번째는 초대교회와 같은 정치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교회와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조직으로 구성된 정치를 최대한으로 단순화하고 나머지들은 모두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성례와 모임과 전도와 그리고 자기 삶에 충실 하는 것이다. 누가 성도들에게 교회 개혁을 요구하겠는가? 성도들은 개혁을 할 수 없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를 개혁한 자들은 성경을 깊이 아는 자들이었다.

목사들이 먼저 지역의 교회를 연합하고 하나 되는 운동이 그래서 선행되어야 한다.

목사들이 먼저 성경을 연구하는데 집중하여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목회를 하는 것이 본인은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회는 목사의 사례를 충당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많은 교회의 헌금이 목사 사례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

초대교회는 날씬한 교회의 직분으로 운영되었다. 그래서 헌금으로 교회의 일을 잘 감당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로 돌아가려면 먼저 목사들이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 특히 사도들이 세운 직분의 숫자는 오늘날과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성경은 밝히 말하길 감독은 여자가 될 수 없음을 밝힌다. 그런데 오늘날 여자가 목사가 된다면 이는 이미 목사의 위치가 초대교회의 감독의 위치가 아닌 것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목사들의 위치를 수정하는 것부터 교회 개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정상적인 것은 목사들은 일반적인 교회의 교사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직업도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본다. 초대교회의 감독의 숫자와 오늘날 목사의 숫자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 원인은 교회가 수천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초대교회 감독의 위치가 아님을 직시하고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 할 수 있거든 직업을 가져야 하며 교회의 교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의 감독의 위치는 그 지역 전체를 통제하는 유일성이 있었다.


이 것은 그리스도가 홀로 교회의 머리됨을 대신 감당하는 감독이라는 것이다.

일종에 대타로 일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복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세운 직분으로 한정하고 그 범위도 그렇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목사들이 모두 선생이 되어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성도들이 감투를 가지고 교회에 만족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제 교회는 영적으로 철저히 다이어트를 해야 할 것이다. 비만한 교회, 배부른 교회 그리고 나누어져 서로 갈라진 교회를 한 몸으로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우리 목사들이 먼저 희생할 각오로 개혁에 앞장선다면 성도들이 비난을 하겠는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먼저 희생하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성도들도 따라온다는 것이다. 정당성은 오직 성경이다.


교회의 운영은 자본주의 운영도 아니다.

교회의 정치는 민주주의 정치도 아니다.

교회의 주권은 성도들의 것도 아니다.


이렇게 오늘날의 교회는 과거 카톨릭과 반대된 길로 걸어가면서 민주주의 교회로 세속화 되었다. 과거 카톨릭은 왕정정치를 모델로 교황정치를 만들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으로 나온 개신교는 그 정반대의 정치인 민주주의 의회 정치를 만들어 갔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주권적 통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이며 성령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이 원리는 현재 예수와 사도들은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세운 교회의 터와 직분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러한 터 위에 다시 올라서야 할 것이다.


세상의 개혁도 희생이 따른다.

양극화의 해소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희생하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지구촌에는 하루 수만 명이 양식이 없어서 죽는다.

우리 목사들은 생계를 위해서 목사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멀쩡한 직업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사고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목사들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 도움이 되고 사회에 도움이 되며 나아가서 실력 있는 목사님들의 말씀이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게 된다는 것이다.


더 큰 경제적인 이익은 교회의 재정이 엄청나게 줄 것이다.

그 모두가 선교에 쓰여 진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선진들 중에는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고생을 하였다. 그들이 희생한 것과 비교하면 경제가 좋은 나라에서 직업을 갖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감독으로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감독은 한 동을 감당하는 대표적인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그 감독의 위치가 도시를 대표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교회를 초대교회 사도들이 세운 교회로 세상에서 세속화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개혁의 진정한 방향으로 생각한다.

카톨릭은 지금도 지역 중심으로 모인다.

사실 이것만큼은 우리가 성경적인 것으로 알고 따라야 할 것이다.


[2007년 3월 15일 김인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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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시대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된 의미]**


다음 까페 호산나 마을( cafe.daum.net/hosannakim )


[내용]


*난해구절 해설


1)벧전 3:20

이 구절에서 말하는 자들은 불순종한 자들을 말한다.(옥에 있는 영)

예수의 죽음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은 불순종한 자들이 물로 심판되어 그 옥에 갇혀있는 것이 정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그 옥에 갇혀있는 것이 확정되었다.(음부)


2)벧전 3:6

이 구절에서 말하는 자들은 믿음으로 순종한 구약의 죽은 성도들을 의미한다.(옥에 있는 영)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구약시대 믿음 안에서 죽은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의 죽음이 옥에 있는 그들에게 복음으로 전파되어 그들이 예수와 함께 낙원에 이른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보다 앞서서 어느 누구도 낙원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성도들이 옥에 있는 것에서 벗어나 예수와 함께 낙원에 이른 것이다.(사냥꾼의 올무에서 완전한 해방)


이렇게 노아시대 물 심판으로 죽었던 영들에게 그리스도 영이 찾아가서 전파되었다는 것은 복음이 아니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그 소식은 그들이 물로 말미암아 죽은 것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예수의 죽음은 모든 육체를 가진 자들의 심판을 의미한다.(죄인) 모든 육체가 죽은 것이다. 모든 육체가 죽어 심판되는 것이 정당한 것이 됐다는 것이다.(죽은 자들에게도 의인 예수로 죄인의 영(영혼)들이 심판되는 것)


아담이 죽고 그리고 육체로 오는 모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음으로 달려갔다.

이러한 육체의 죽음이 정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육체의 죽음이 정당하게 된 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사람들 중에서 선과 악의 기준 없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은 많은 죄인들 가운데서 유일한 의인의 죽음이었다. 노아시대의 불순종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과거 물로써 육체를 심판하신 것이 예수의 죽음에 의해서 정당한 심판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혹은 선언하는 것과 같다)


예수가 오기 전 이 땅에는 의인이 죽었던 사실이 없었다. 모두 죄인들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의인이 세상에서 육체로 죽음을 당하자 육체로 죽은 모든 자들의 육체적 죽음이 죄인에 대한 정당한 심판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육체적 죽음으로 육체로 죽은 모든 자들에게 심판의 기준이 된 것이다.(사람들 중에 선과 악) 이 노아시대 하나님의 육체적 물 심판이 정당화 된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된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죽음이 그래서 그들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죽었는데 예수는 의인으로 죽었다.

그는 죽었던 성도들의 죄를 위해서 의를 그에게 적용시킨다. 옥에 있는 자들에게도 죄 사함의 은총을 주시고 그를 하늘에 오르게 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렇게 모든 육체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동시에 예수의 부활은 모든 육체로 살아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007년 3월 17일 김인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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