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메인콘텐츠 바로가기

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통합검색

감신소식

> 감신소식 > 공지사항 > 취업게시판

취업게시판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곳입니다.

작성자
김인찬
등록일
2007-03-12 00:00:00
조회수
871
첨부파일
 취업은 아닙니다....교회개혁 자료입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찬송가 판매행위는 과연 성경적인가??]**


혹시 제 글이 삭제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마 이 글과 연관된 단체와 상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용납될 수 없는 교회의 행위에 대한 성경적인 소견입니다. 수정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찬송을 하기 위해 목사가 찬송가를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그 목사는 교회의 재정으로 찬송가를 만들고 교인들에게는 이 찬송가는 저작권이 있으니 권당 얼마씩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찬송가는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교회에 의해 만들어져서 사용되는 것이다.

교회가 찬송가를 만들 때에 그 [비용이나 혹은 재정부담]을 판매행위로 충당한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에서 얼마나 타락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찬송가는 영적인 교회가 영적으로 사용하는 책으로 세상의 것과는 다른 성격이다.

찬송가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으로 찬송이 드려지는 내용이 가득차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러한 내용을 만들고 그 내용에 대한 판권을 행사한다면 이는 신성모독과 같은 행위이다. 성경 어디에도 찬송을 돈으로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찬송가는 세상의 기관이나 세상의 방법대로 교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부르는 이러한 신성한 내용을 세상의 방법대로 판권행사를 주장한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비용을 부담하라고 주장하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호를 한번 부르는 대신 [백만 원]을 바치라고 하나님이 주장한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으시고 성경 그 어디에도 교회가 판권행위로 신앙을 도모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찬송가를 구입해서 누구를 이롭게 하려는 것인가?


찬송가는 교회 안에서 제작되는 것이 마땅하다.

교회 안에서는 제작과 그 전 과정이 신앙행위로 포함된다.

제작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정은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교회의 찬송가를 판매하는 행위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무시하는 인간적인 발상과 같은 것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가 물건을 판매하고 그것으로 운영하는 것은 과거 카톨릭의 타락 다음으로 중대한 인간들의 오만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이 될 수 없다. 교회의 이름으로 성경과 찬송가를 판매하고 교회는 이것을 사들이는 이러한 문화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것인데 교회가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는 헌금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준비하는 믿음의 원리가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운영되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찬송가 판매행위는 성부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 안에 성부 하나님이 포함된 성호가 수두룩하다.

그 안에 성자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가 즐비하다.

그 안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활동을 간구하는 내용이 가득차있다.


이러한 내용의 찬송가를 마치 세상의 논리대로 판매한다면 삼위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성부가 그것을 원하겠는가? 성자가 그것을 원하겠는가? 성령이 그 돈을 얻는 것을 참으로 성도들 안에서 바라겠는가? 라는 것이다.


기독교 찬송가를 제작하는 단체가 교회 밖(세상단체)이라면 몰라도 교회 안에서 이러한 행위를 행사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신성을 격하시키고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망할 짓을 교회가 스스로 행사하고 있지 않는지...??


우리는 이 문제를 성경적으로 좀더 살펴보자.


그 내용은 거룩한 내용으로 가득차있다.

그 내용을 부를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며 성령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그 내용대로 교회는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교회로써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 내용은 과거 우리가 세상사람 이었지만 이제는 성도가 되어서 구원을 받아 찬송한다.


이렇게 그 내용은 마치 우리와 하나님과 항상 연관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속한 것은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들어온 것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교회의 몸이 되었다(믿음으로 들어 온 것이며 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이렇게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스스로 망각하고 세상의 질서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이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스스로 부정하려는 행위이다.


먼저 판매해위가 정당한가? 라는 성경적 질의도 없이 과거의 관습대로 행하는 것 그 자체가 기독교의 타락을 가중시킨 것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혹은 성도로써 어떠한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할 일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교회됨을 부정하려는 행위이다. 그리스도로 허락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목사는 성도들의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교회가 목사를 마치 자신들이 고용한 설교자로 인식하고 월급을 주는 논리는 세상의 논리이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논리와 달리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교회감독은 하나님의 것으로 산다는 것이다.(교회직분=하나님의 직분)

이렇게 감독이나 혹은 집사나 혹은 장로이든지 모든 직분이 하나님의 교회의 직분이다.

하나님의 직분이기에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중에 감독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세운 자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를 마땅히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월급의 개념이 아닌 서로 주 안에서 섬기는 개념이다. 고용하고 그 싹을 교인들이 주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고용하고 세운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를 고용했으며 성도들에게 그를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세운자도 하나님이시며 책임을 지는 것도 하나님의 백성(교회)이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와 전혀 다르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교회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우리 생명자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하며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생명을 얻는 영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가 세상의 논리대로 행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우리가 얻었듯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어떤 값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교회에 오면 얼마 줄 것이니 나오라고 권했다고 하자 그럼 이것이 바로 영생을 돈으로 팔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세상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속하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려는 신앙행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 행위 속에 물질이 오고 가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아들들을 찾을 때에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와 피로써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교회라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돈을 주고 신앙의 행위를 모색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이제 교회는 카톨릭을 비판하기 전에 기독교 자체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믿음의 원리이다. 설교를 듣고 얼마를 기부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모든 생명을 우리가 얻었으니 우리가 사는 날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교회가 사용하는 것이니 찬송가를 원가로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참으로 이상한 논리이다. 교회가 무슨 기부단체도 아닌데..,,?? 이런 선심 쓰는 것도 용납되는 것이 아니다. 찬송가는 교회가 전적으로 준비해야 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가 찬송가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배에 사용하는 것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혹은 거룩한 성도들의 신앙을 위한 교회의 선택이다. 찬송은 하나님의 몫이며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위치이다. 그러한 찬송 행위를 우리는 돈으로 사서 준비하는 것이 아닌 이미 믿음으로 드려진 헌금으로 준비하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리는 것이다.


찬송은 그 준비부터 찬송(예배)에 부합되어야 한다.

찬송가를 준비하는 것도 찬송을 위한 첫 걸음이다.


믿음으로 준비하는 원리는 돈을 주고 사고파는 그런 거래가 아니며 순전히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서 믿음으로 준비되는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교회는 나라의 통치를 받아야 되기에 그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내용의 찬송가를 세상에 맡겨서도 안 되고 세상단체와 같이 사고파는 행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교회가 그 거룩한 내용의 찬송을 스스로 준비하고 이것을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믿음의 원리이다.


모든 성도들의 은혜는 위로부터 오는 은혜라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을 위로 올리지만 동시에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로 올리는 거룩한 찬송가의 내용들을 마치 은혜를 우리가 받기 위해서 돈을 주고 준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모든 것은 상업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자체가 하나님의 소유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간적인 거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세상의 논리대로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논리는 반성경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교회가 장사하는 행위는 이미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상을 엎었던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있고 없는데 하나님의 교회의 찬송가는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며 교회가 성도들을 위해서 준비된 헌금으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교회의 이름으로 차량 운행을 하면서 운임을 받는다고 하자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을 위해서 장사하는 꼴이 된다.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가 찬송가를 판매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사업하는 분도 아니며 부동산 투기하는 분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부동산 투기까지 하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찬송가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 마치 성경과 교회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혹은 기도와 교회가 분리되지 않는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준비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성경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회개할 부분이지 타협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저작권 행사하는 것을 보면 너무 이상한 일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을 저작할 권한을 약2000년 전에 이미 받았다.

말씀을 전파하라 혹은 가르치라는 것은 무상으로 하는 은혜의 행위이다.

만약 저작권을 행사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현실적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누구도 개인이나 단체가 성경을 임으로 사유화하거나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은혜를 그저 주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그런 저작권 행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저작권 대신 성경으로 은혜를 받으라고 할 것이고 가르치라고 할 것이며 성경을 전파하라고 할 것이다. 그런 일은 성령이 다스리는 교회가 하는 것이다.


성령은 지금 우리 밖에 계시는 분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교회는 기억해야한다.


2007년 3월 11일 (김 인찬 목사)


**[도올님 이 글에 대해서 반론부탁]**


도올이 개종한다면 한국교회를 개혁할 인물임에는 틀림없다고 본다.


한국교회가 도올의 주장에 성경신학적 입장을 정확하게 내놓고 있는가?

본인은 작은 목사로써 순수 성경신학적인 입장을 가지고 도올의 주장에 반대합니다.(도올의 사상과 달리 개인적 입장입니다)


[내용]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마치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동일시해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약성경은 예수가 오기 전 약속과 예언이며 신약성경은 예수로부터 시작된 약속과 예언으로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이렇게 예수로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반듯이 먼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성경의 내용을 먼저 예언과 언약으로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의 언약은 이미 이루어졌다. 예수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옴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있으며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구약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언약과 구약을 함께 보려는 잘못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약성경의 언약이 옛 언약이 되었기에 구약성경을 폐지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예언은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내용이 예수오기전과 그리고 예수가 오신 이후 그리고 재림과 그 이후전체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구속 역사에 대한 예언은 이렇게 계시록까지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두고서 마치 구약성경이 옛 언약이므로 폐지되어 신약성경이 있다는 이해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은 언약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그리고 예언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루어짐으로 신약시대의 새 언약이 세워졌다는 이해가 정상적인 이해로 보아야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율법과 그리고 예언은 폐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흔히 구약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구약시대의 언약을 성취됨으로써 새 언약이 세워졌기에 구약성경을 필요 없다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언약이 새 언약을 기다렸고 예수는 구약시대의 언약을 이룸으로 새언약을 완성한 것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볼때에 구약시대의 언약은 약속이며 이 약속자체는 완성이 아니지만 그 약속을 이룸으로 완성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언약은 약속이었으며 그 약속이 이루어짐으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으로 서있었던 구약시대의 언약은 이제 지나간 언약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성취됨으로 지나간 옛 언약이 되었다는 것이며 성취됨으로 동시에 새 언약이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구약시대의 언약은 이미 지나간 것은 인정하지만 도올의 주장인 구약성경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지지하지 않는다. 옛 언약이 폐지 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성취되어 새언약이 세워졌으므로 소용이 없는 언약이 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신약시대의 사람이다. 이는 옛 언약이라는 표현으로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옛 언약 그리고 신약성경=새 언약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이렇게 분명히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약은 역사적 시간적으로 연결된다는 연속성이 있는 동시에 분명히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루어져 새 언약이 옴으로 구약시대의 언약은 지나간 언약이 된 과거이며 우리는 현재 이루어진 새 언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구약시대의 언약만을 현재 믿고 있다면 그는 구약시대 언약이 이루어져 새 언약이 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과거에 이루어져 새 언약으로 바뀌었는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는 자는 이미 약속이 이루어져 성취된 새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구약시대 언약이라는 약속이 이루어졌는데 여전히 지금도 약속을 기다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자한다.

구약과 신약이 올바른 용어인가라는 것이다.(아래 글은 퍼온 글)

구약에서 약이라는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름: 약(約/ testament)이란 간단히 언약(Covenant)이란 뜻이며, 인간들 사이에, 또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이다. 성경과 관련되어 있는 한, 구약(the Old Testament)이라고 하면 이는 시내산(Mt Sinai)에서 하나님이 유대인과 하신 언약, 옛 언약의 기록을 말한다. 신약(the New Testament)이란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기록이다.(출처 미상)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라는 질문이다.

위와 같이 구약시대의 성경을 옛 언약이라고 이해한다면 이미 이루어진 느낌을 주는 동시에 옛 언약과 동일시하기 쉽다는 것이다. 신약이라고 정의한다면 신약성경이 곧 새 언약이라는 것으로 쉽게 이해하고 구약성경은 이미 모두 성취되어 폐기되어야 한다는 논리도 나타난다.


그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방법은 무엇인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구속사로 보는 이해가 먼저 전재되어야하며 그리고 그 명칭도 바뀌거나 혹은 개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옛날의 약속으로 이미 성취된 것으로 이해하기 쉬워서 폐기되었던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구약성경대신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달리 불려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구약성경을 예수 오시기 이전의 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시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것도 구약성경이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신약성경만이 새로운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신약성경을 예수오신 이후의 책으로 부르거나 가르치는 것이 더욱더 합당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후에 기록된 책으로 부르거나 그렇게 가르친다면 신약성경에 대한 모든 것이 합당하게 여겨질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예수가 오기 전에 기록된 구약성경을 폐기해야 된다는 주장은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한국어로 표기된 이러한 오해는 이제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바꾸어서 부르든지 아니면 설득해야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은 이루어진 약속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가 구속사의 중심이며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에서 약속이 예수에 집중되었다면 예언은 재림이후까지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책 이름을 바꾸지 않으려면 신약과 구약에서 사용하는 [약]을 언약이 아닌 약속으로 이해하고 예수오시기 이전의 약속과 예수 오신 이후의 약속으로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누구 말대로 구약은 폐기 되었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오해의 소지를 종종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흔히 이들은 옛 언약의 책인 구약성서와 그 언약을 이룬 새언약에 관한 책인 신약성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종종 오해한다는 것이다. 이 두 책을 언약과 연결시켜서 구약을 약속과 신약을 성취라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렇게 구약이라는 옛 언약의 책이 신약이라는 새 언약의 책으로 완성되어진 것으로 이해한다면 도올과 같이 구약성경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나타난다.


언약에 대해서 살펴보자 옛 언약을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약속과 성취로 크게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취됨으로 과거 구약시대 약속된 언약은 완성되어진 것이다.


새 언약이 성취됨으로 옛 언약이 폐기되었다는 표현도 무리이다.

옛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새 언약을 전재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새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옛 언약을 성취한 것을 두고서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약속과 성취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언약의 연속성은 약속된 언약(구약)이 예수로 성취되어 새 언약이 새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불연속성은 새 언약이 옴으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엄격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언약에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또 그들이 유대인과 같은 자들일까? 라고 질문한다면 본인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구약성서만을 믿는 그들은 스스로 옛 언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새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이다. 옛 언약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이 왔다는 것은 옛 언약 안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옛 언약은 새 언약을 위해서 존재했던 것이며 새 언약이 성취됨으로 구약시대 언약을 엣 언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옛 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은 새 언약이 성취됨으로 옛 언약이 된 것이다.

구약시대 언약이 옛 언약이 된 이유는 바로 새 언약이 성취됨으로 옛 언약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새로운 완전한 새 언약은 구약시대 약속된 언약을 성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언약에 있는 한 옛 언약은 옛 것이 된 것이다. 옛 것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으로 볼 수 있는 언약이다. 이렇게 이미 지나간 것을 두고 우리는 옛 언약이라고 말하고 예수로 말미암아 성취된 완전한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분명하게 예수로 나뉘어 지는 것과 시간적으로 연결된 특징이 있다.

구약성경이 폐기되었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약속과 성취 그리고 시간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성을 소홀히 하는 가운데 나타난 오해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언약은 폐기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구약성경에서 폐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제사와 그리고 율법에 속한 의식은 폐기 된 것이다. 먼저 구약시대에 주어진 율법을 살펴보면 현재도 율법은 그대로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완성한 은혜의 법도 함께 공존한다.


이것을 사실 약속과 성취로 연결해서 보는 이해보다는 먼저 율법과 그 율법을 완성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약속과 성취의 성격도 있지만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을 요구한다. 모든 인간은 그 완전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복음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에나 하나님의 완전한 요구라는 것이다. 그런 요구에 완전한 만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은 구약시대에선 불가능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로 말미암는 십자가의 구속과 그 은혜로 우리는 완전한 만족을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다. 율법은 이렇게 현재도 있으며 또한 은혜가 공존하고 있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이다.


이렇게 구약시대 언약은 지나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상 폐기라는 표현보다는 지나간 언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은 언약의 이해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적인 요구라는 것이며 이것은 현재도 폐기되지 아니하였다. 또한 완전한 율법의 요구인 은혜도 또한 현재 있는 동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언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점으로 보면 옛 언약이라는 말자체가 구약시대의 언약이 이루어짐으로 구약시대의 언약이 성취되었다. 그렇다고 구약시대의 언약을 폐기된 언약으로 말하는 것보다 지나간 옛 언약 혹은 이루어진 언약으로 볼 수 있다.(시간적 이해)


율법은 언약과 달리 앞서 설명한 것처럼 폐기가 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 구약시대의 요구가 오늘날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요구을 만족하는 구원의 은혜도 동시에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은혜는 없었다.


옛 언약 안에서 행하여진 의식과 행위들이 폐기 된 것은 옛 언약을 이룬 새 언약이 옴으로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시간적으로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성취되어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으로 구약시대의 언약을 성취함으로 새 언약이 만들어졌고 구약시대의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시대의 언약이 예수로 말미암아 새 언약으로 이루어짐으로 이제 구약시대의 법과 제사보다 신약시대에는 은혜의 성령의 법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구약성경=옛 언약]과 [신약성경=새 언약]으로 동일시해서 그림자와 실체로만 단순히 본다면 실체인 신약이 왔으므로 구약인 그림자는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예언과 언약 그리고 율법에 속하였다면 신약시대에는 언약에 대한 성취와 예언에 대해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우주적 구원의 성격이 있는 것이다.


참고: 급히 올리는 바람에 수정이 될 글입니다.(2007년 3월 6일 김인찬 목사)

다음 카페 [호산나 마을]에서 올립니다.

비밀번호 입력
담당부서 :
전산과
전화번호 :
02-361-9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