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게시판
교회 사역자들에게 필요한 자료 카페초대합니다.
- 작성자
- 김인찬
- 등록일
- 2007-04-06 00:00:00
- 조회수
- 868
- 첨부파일
최초로 공개되었던 신학적 내용들이 [약 30여가지] 이상 됩니다..오셔서 참고
**[교회정치의 진수를 보여준다.]**
*<다음 까페 호산나 마을( cafe.daum.net/hosannakim )에서 제공합니다>*
민주주의 교회정치가 비성경적인 것은 민주의의 사상에 의해서 자본주의 교회로 나타난다.
민주주의 사상의 특징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주는 사회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쟁을 일으키고 나아서서 오늘날과 같은 빈부의 차이를 보인다.
한국교회가 의회 민주주의 정치를 채택한 결과 자본주의 교회로 나타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결국 민주주의 정치는 성경적인 정치가 아니라는 것이 백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의 출발은 국가가 아닌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정치이다. 그러한 정치는 결국 개인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철저히 개인의 능력이 평가되는 시대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도 능력 있는 목사가 살아남는다.
그리고 빈부의 차이로 교회가 되었고 심지어 그 차이는 자본주의 한국사회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세상의 논리는 철저히 세상의 논리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명백히 그 열매가 성경적인 정치가 아님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정치를 찾으려는 노력을 보이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성경적인 정치는 무엇인가? 앞서 말한 것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교회는 개인의 출발이 아닌 공동체가 먼저 있는 정치이다.
왕 같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가 있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구원이다. 마치 이미 왕과 나라가 먼저 있고 그곳에 백성들이라는 성도들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오자마자 평등이면 또한 자유이다. 이는 민주주의 평등과 자유와는 다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평등이며 자유라는 것이다.(김정일이 아닌 하나님께서 모든 주권과 권한을 가진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민주주의는 만들어가야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 하나님의 자유와 평등이 있고 그 안에 들어와서 누리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와 평등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 성도들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치는 철저히 공동체로 나타난다.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공동체가 형성되면 질서가 있다.
그래서 예수는 먼저 나라의 큰 질서의 틀을 만들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로 시작해서 교회의 기초를 세웠고 그 기초는 아래와 같은 특징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세운 터 위에 교회가 확장되고 들어선다는 것이다.
그 터는 흔들 수 없고 누구도 다시는 손댈 수 없는 터가 되었다. 사도들이 다시 와서 터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들이 이미 세운 직분이 최선인 것도 그렇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의회정치를 하지 않고 철저히 개인목회를 한 것이다.(공동목회가 아닌 단독) 이렇게 개인목회가 정당한 이유는 이미 공동체가 하나이기에 한 지역의 공동체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홀로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을 다스리듯이 대신해서 홀로 다스리는 원리로 나타났다. 감독이라는 명칭 자체가 개인의 직분이며 개인이 다스린다는 호칭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의회를 만들었다는 사도들의 증언이 없고 의회를 창설해서 교회의 터를 만들었다는 것도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왜 사도들이 의회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의회를 만들면 자연히 위로 통치 받는 것보다 사람들의 공동 다스림이 된다.
이것은 교회의 주권이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종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교회를 다스리듯이 그리스도대신 지역을 각각 담당하는 개인을 세웠다는 것이다.(명백한 성경적인 근거)
만약에 의회를 세우면 여야로 나누어져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렇다. 목사파와 장로파로 나누어진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그 자체가 공동체를 나누는 정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도적 계승으로 된 개인적인 다스림을 선택한 것이다.
이미 공동체가 하나이기에 여야를 용납 못하는 정치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왕정정치와 같은 것이다. 예수가 교회의 머리(왕)라면 그의 백성인 성도들은 모두다 그의 다스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백성 중에서 뽑아서 감독이 된 자들은 왕 대신 백성을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이들이 교회의 감독과 장로이다.
그러므로 왕 대신 다스린다는 의미로 위임이 되었고 대신 다스린다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가 여럿이면 여럿을 만들어서 그들로 다스리도록 할 것이다.(공동의회)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이듯이 그의 종들도 개인적으로 일한 것이다.(안수는 대리통치를 의미)
이 지구상에서 나누어지지 않고 하나 되는 정치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러한 정치는 왕정정치였다. 왕이 모든 백성을 소유하고 그들을 다스린다.
그런 절대적인 정치가 사실상 성경적인 정치이다. 세상의 왕정정치는 모두 무너졌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그들이 스스로 갈라지고 나누어져 각각 살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듯이 그리스도도 하나라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유일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모든 교회를 다스려야 되는데 과연 민주주의 정치가 가당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누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이제 교회는 왕과 같은 그리스도를 교회에 적용해야한다.
교회에 왕이 있다. 그리고 그 왕이 모든 성도들을 다스린다. 모든 성도는 그 왕이 세운 대리자들인 감독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다. 이것이 성경적이다.(의회로 다스리는 것이 아님)
물론 그 직분인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다.
감독과 장로와 집사인가? 아니면 (감독=장로)와 집사인가? 라는 것이다.
본인은 삼중직을 선택하고 있다. 성경적인 증거와 초대교회의 역사적 증거가 있다.
결국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더라도 의회정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의 직분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교회이다. 의회를 만들면 공동체가 나누어져버리는 것이다. 왕이 있는데 의회가 말이 되는가?
왕이 있으면 그 밑에는 그의 명령으로 다스려지는 것뿐이다. 그 명령은 하나님의 직분 자들인 종들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 정치의 틀이다. 카톨릭은 그 왕을 교황으로 만들어버렸다. 개신교는 그 왕을 따로 두고서 공동체가 스스로 일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도 교인들의 종(자신들의 종)으로 만들려고 한다. 오늘날은 성도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려는 이상한 시대가 된 것이다.
마치 왕정정치는 일인 독재정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감독자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맡은 양들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가 마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매우 이상하게 들린다.
민주주의는 왕이 없다. 오직 국민이 대통령도 스스로 뽑는다.
그러므로 국민의 대통령이다. 즉 대통령의 국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정치는 이와 달리 예수의 백성이 된다. 백성이 예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그의 백성을 피로써 사서 백성을 삼았다는 것이다.(예수의 백성)
그런데 오늘날 예수의 백성들이 스스로 독립선언을 하려고 한다. 일인 감독을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교인(백성)의 주권으로 공동체가 다스려져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려한다. 이것이 무슨 망언인가? 교회의 소유가 그리스도인데 교회(성도)가 스스로 다스린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린지 깊이 생각해보자. 교회 안에 있는 감독과 장로에 의해서 다스림을 거부하는 것은 그를 세운 그리스도의 통치를 직접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심각한 것이다.
교회(성도들)에게 이런 권한을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스스로 다스리는 권한을 준 것이 아니다.(오직 종들로 다스려지는 원리만 줌)
왜 교회에 안수가 필요한가? 위에서 그리스도 대신 세운다는 의미로 위임하는 대리적인 통치자를 세우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대신 일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민주주의에서는 왕정정치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기에 강하게 거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과거 로마나라에서 예수라는 왕과 하늘나라를 믿는다고 해서 세상에 있는 로마나라의 왕으로부터 많은 성도가 비참히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민주주의 교인들은 교회는 왕과 그의 종들이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소리치고 있다. 이 지구상에 어떤 왕정국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적인 통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정치가 무너졌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왜 무너지지 않는가?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영원히 죽지 않는 교회의 왕으로 살아계시기에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왕들은 죽었다. 그만이 죽지 않았다. 그 왕이 있는 한 교회는 결코 망하지 않고 재림까지 이어질 것이다.
==============================================================
성경에서 말하는 안수의 원리는 개인에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개인이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세워지는 원리가 안수의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의 특징은 개인의 믿음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자들은 자기 직분의 유일성을 인정한다.
즉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의 직분이라는 것이다.(사도이면 사도 감독이면 감독 집사이면 집상이다) 그러한 직분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원리는 성경이 처음부터 따르고 있었다. 물론 임시적인 회의를 할 수 있지만 항존적으로 의회가 있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수로 의회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들도 개인적으로 사도직이며 감독도 개인적인 직분이며 장로도 그렇고 집사도 그렇다.
그들이 물론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반적으로 교사를 세운다면 항존적인 직분이 아닌 장로들에 의해서 세워진 자들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의회정치의 문제점은 교회가 나누어지고 갈라지고 온갖 문제를 양성한 거짓된 열매를 통해서 성경적인 정치가 아님을 확인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참다운 성경적인 정치는 이렇게 교회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열매로 안다)
개인으로 세워지는 원리대신 임원들을 선출해서 의회를 만드는 자체가 비성경적인 방법이다. 개인의 직분이 의회로 나타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거치면서 나타난 것이다. 의회정치는 비성경적인 교회의 정치라는 것이다.
개인에게 일정한 지역을 맡기지 않으면 자연히 의회가 형성되게 된다.
의회는 한 지역을 공동으로 다스리는 제도이다. 공동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협의가 되어야하고 자연히 회의를 해야 하며 그러한 일이 자주발생하기 때문에 회의를 위한 혹은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의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경적으로 개인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교회정치 대신 세속화된 교회는 공동으로 다스려지는 의회정치를 만들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다스림을 의회로 만들었던 배경은 감독들과 집사들로 교회를 다스린다는 주장을 하였고 거기에다가 교인들을 끌어들이면서 민주주의 의회정치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의회는 교인들에게 직분을 주고 의회 안에서 활동하게 함으로 교회는 성직으로 다스려지는 것을 약화시키고 의회로 다스려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감독개인과 감독개인이 서로 각각 독립되어있고 서로 각각 고유한 지역을 다스린다면 직분의 유일성과 지역의 단일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결국 의회는 필요가 없게 된다. 간혹 회의는 할 수 있지만 각각의 고유한 감독권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다스림이 있는 것이 초대교회 감독정치였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으로 교회는 스스로 정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회를 만들어서 교회공동체가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이 정치를 더욱더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민주주의 교회정치라고 볼 수 있다.
감독이라는 것 혹은 장로라는 것은 개인의 직분이며 또한 고유한 지역을 맡아서 다스린다는 호칭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다스림을 포기하게 만든 것이 의회정치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의회정치는 초대교회의 모습과는 매우 거리가 먼 모습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정치는 사도적 안수의 원리로 세워진 개인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치가 아니다. 오늘날 민주정치는 공동체의 투표로 선발되고 그들을 교육시키고 안수해서 세운다. 그리고 그들은 의회에 속하여 일하게 된 것이다.
즉 의회에서 직분 자를 세우는 원리이다. 총회에서 세우듯이 노회에서 인가하듯이 의회가 직분을 세우게 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정치인 개인이 여러 사람들의 안수로 세워지는 원리와 다른 것이다. 장로들에 의해서 장로와 감독이 세워지는 것이 아닌 의회로 만들어진 기구에 의해서 그들이 의회에 속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의회가 그들을 치리하는 기관이 된 것이다. 성경은 혹시 장로들이 문제가 있으면 사도나 감독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그들을 치리한 것이다. 역시 장로도 자신이 맡은 성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들을 개인적인 장로(감독)의 직분으로 치리한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다스림이 초대교회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교황정치로 나서면서 수직적인 다스림이라는 거대조직이 된 것이다.
즉 개인적인 치리가 아닌 교황과 그 아래에 있는 자들에 의한 공동치리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한 왕정통치가 카톨릭이다.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거부하는 정치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고 그가 세운 직분 자들이 각각 고유한 일을 맡았는데 그것을 교황이 독식하게 된 것이다. 개신교는 그와 반대로 나타난다. 즉 카톨릭은 머리를 부인했지만 개신교는 몸을 갈라놓았다. 그 몸을 하나로 남게 하는 것은 각종 분파주의가 아니다.
회의를 통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닌 안수의 원리에 의해서 세워진 자들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회의가 반드시 필요한 조직은 의회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개인의 다스림을 포기한 결과 교회라는 몸은 다양한 정치(의회)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개인의 다스림을 포기한 교회라는 몸은 이렇게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를 갈라지게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방법이 있는가?
우선 생각해보자 개인의 다스림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종의 봉건제도와 같다.
각 성을 개인의 성주가 있다면 모든 성들은 고유한 영역으로 각각 나타난다. 즉 누구도 다른 성을 침범하지 않고 각각의 고유한 다스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정치는 이렇다.
그리스도가 유일하다. 머리라는 것이다.
이는 왕정정치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가 모든 교회를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아래는 모두 그리스도에게 종속 되어야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교회를 시작한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직분을 세웠다. 사도들이 개인적으로 다스렸듯이(동역자들로) 그 아래에 있는 자들도 개인적으로 교회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을 정해서 다스린 것이다.
개인의 고유한 감독이라는 직분은 개인의 다스리는 영역과 연관된다.
감독이라는 말 자체가 일정한 범위를 다스리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감독과 다스리는 영역이 이렇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이 의회나 혹은 조직으로 자신의 지역을 다스릴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자신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러한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직분으로 자신의 지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 의회로 다스린다는 것은 이미 개인의 다스림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회가 어떤 의회냐에 따라서 각각의 교파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분파주의는 의회정치를 선택한 결과이다. 만약에 한 지역을 한 사람으로 맡기는 봉건적 다스림이 되게 한다면 나누어 질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미 직분과 영역이 정해진 것이다. 감독이 있으면 그가 맡아야 되는 지역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직분으로 범위가 정해지는 원리가 성경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포기하고 조직과 의회라는 기구를 만들자 직분으로 정해진 범위대신 의회가 정해지는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의회도 각각 성경적인 의회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는 직분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닌 의회들로 각각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결론으로 교회의 정치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며 그가 사도로 그리고 감독으로 그리고 장로로 그리고 집사로 세운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자들은 그 직분이 그리스도와 직속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교회를 나눌 수 없었다. 즉 모든 직분이 그리스도와 연결된 직분이다.
그러한 연결을 카톨릭은 교황으로 독식했고 개신교는 의회로 분열시키게 된 것이다.
의회는 나누어져도 직분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다. 초대교회 감독이 모든 지역의 감독과 같은 감독이었다. 역시 장로도 모든 곳의 장로들과 같은 장로이다. 집사도 모든 교회의 집사와 같은 집사이다. 이러한 교회의 통일된 직분이 얼마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었는가가 교회를 바로 세우게 되는 원리인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연결을 사도로부터 찾아가야 한단. 결국 사도-속사도(감독)-장로-집사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속사도가 빠지면 사도와 장로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 장로교는 이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3월 27일 김인찬 목사)
- 담당부서 :
- 전산과
- 전화번호 :
- 02-361-9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