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님 여기에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장로교로 인하여 감리교가 피해를 당하는 것은 사실이다..(장로교 목사)**
[교회의 주권이 교인에게 있다는 것은 사탄의 명백한 속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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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교회의 질서라면 초대교회 왕정정치 때에 민주주의가 교회의 제도로 도입됐어야 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도정치 그 후에 감독정치로 나타났다.
장로교 헌법에 교회의 주권이 교인에게 있다는 것과 그 정신은 교회를 교인들에게 넘기려는 위험한 발상과 같다. 실재로 오늘날 소외 교회개혁이라고 외치는 곳은 민주주의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으로 목사의 독재 장로의 월권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그들은 강력하게 요구한다. 교회의 노조가 생긴 것은 이미 교회가 세속화된 명백한 증거이다. 교회의 노조가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 민주주의 정치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이 분명한 것이다.
교인에게 교회를 넘겨주려면 아예 목사를 교인의 투표로 만들어 버리면 되지 않는가?
실재로 그러한 비슷한 주장이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 평등을 지키는 신임투표를 주장하는 것 등이다. 사실상 교회가 민주주의로 온전히 만들어지면 지금과 같이 평신도들이나 또는 민주 개혁운동을 한다고 요란을 떨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눈에는 교회가 민주주의가 아닌 반 봉건주의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의 외침이 어쩌면 당연히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외침은 성경적인 개혁이 아닌 반 성경적인 개혁이다. 카톨릭이 세상으로 나아갔듯이 이제는 개신교가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힘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요즘의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보다 비성경적인 교회가 대부분 더 잘되고 부흥할 수밖에 없다. 철저한 교육보다 흥미위주 그리고 캠페인 교회 그리고 잡탕교회들이 잘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교회를 흔히 우리는 인본주의 교회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의 요구에 충족해주는 교회가 오늘날 부흥하는 조건이 된 것이다. 즉 교인들의 교회가 되어야 부흥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교회가 교인들의 교회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미 학생들도 자신들이 맘에 드는 교회를 찾아서 다닌다. 마치 자신들의 부모들과 같은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의 교회에 다니는 것보다 자신이 원하는 인기 있는 교회 복음가수 그리고 그러한 워쉽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교회를 그들의 교회라고 일찍부터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성장하면 교회는 더욱더 민주교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어른들은 어떤가? 맘에 드는 교회로 몰리는 것이 이미 교회의 주권이 더 이상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지 않고 교인들에게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작은 교회는 속수무책인 경우가 있다. 대형교회가 옆으로 들어서면 경쟁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가장 어리석은 것은 개척을 대형교회 옆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 못 가서 문을 닫을 것이다. 또는 가장 낙후된 지역에 개척하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 못 가서 교회부흥의 한계를 느낄 것이다.
이렇게 목사는 교인들을 모아야 되는 입장이라면 교인은 선택할 수 있는 실권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목사는 교인의 종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목사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교인의 종인가? 이것은 교회를 뒤집어 놓은 정치이론이다.
교회의 주권이 목사에게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영적인 질서가 적용된다.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소유권이 분명한 것이다.
또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교회의 총감독자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된 그리스도가 사도를 사도는 감독과 장로와 집사라는 최소한의 교회의 직분 즉 하나님의 직분을 세운 것이다. 하나님의 직분이라는 것은 교인의 직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직분의 소유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속화된 교회정치는 세속화된 교인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자들은 이제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자들이 아닌 교회를 스스로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위치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도저히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세상의 논리인 노조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교회를 교인들에게 넘겨주라고 외치는 저 소리는 이제 교회를 더 이상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과거는 목사와 장로의 권한이 교회에 막강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교회가 목사와 장로들의 교회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위치가 이제 교인들에게 넘겨지고 있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교회정치의 기초가 성경적인 기초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 중 교인들에게 안 당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많은 수가 자신의 교인에게 멱살을 잡히고 심지어 오물을 뒤집어쓰는 수모가 있었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즉 목사에게 도전하는 것이 아닌 사실상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도 치리가 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교인 장로가 오늘날 교회에 버젓이 있다는 것은 이미 교회의 치리권이 산산이 무너진 것을 증거 한다.
혹시 치리 한다 해도 다른 교회로 피하면 모두 면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적인 질서라는 말인가? 우리 모두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에 그러한 일이 많지 않는가?
감히 하나님의 종에게 똥을 뿌리는 일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도 누구 하나 심각하게 조사하지 않았고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누구나 그런 일을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인이 당하는 것으로 본 것은 교회가 철저히 개 교회 주의가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주의 종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나두었는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으려는 것보다 심판을 먼저 걱정해야 될 자들이다. 목사가 사소한 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교인이 치리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치리 된다고 해도 그들은 다른 교회로 가면 할렐루야 반기지 않는가? 바로 이런 것이 교인들의 교회를 만드는 충분한 조건이 된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받듯이 이루어야 되는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설사 교인 절반을 희생한다하더라도 교회개혁은 꼭 이루어야 한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것도 이해한다.
그러나 한 고비만 넘기면 한국교회는 미래가 대대로 보장되는데 한 고비가 어렵다고 개혁을 포기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대로 계속 교인의 교회로 방종으로 갈 것인가? 혹은 과감한 결단으로 한국교회를 쇄신할 것인가 결정해야 해야 한다.
사도시대 사도들이 이방인의 권력과 그들의 조롱으로 고통을 당했지 성도들에게 고통을 당하지 않았다. 성도들이 사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있었고 가능했겠는가? 오늘날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목사를 괴롭히는 것도 그와 같은 신적인 도전임을 명심해야 한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당하는 그것이 억울해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신적인 신분인 교회의 직분에 대한 도전이 어떻게 그리 쉽게 보였다는 말인가? 한국교회는 스스로 신분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주의 종이라는 명칭이 붙은 감독자들이 단 한 건도 도전되는 것을 묵인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신에 직접 도전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도전하는 어떠한 행위도 교회는 과감히 대처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마치 교리적인 자대로 무리하게 이단을 나누는 것은 엄정하게 대처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도전하는 실재적인 문제에 대해서 소홀히 한 그 죄는 하나님 앞에서 반듯이 우리가 해명을 해야 될 것이다. 이단보다 무서운 것은 교회 안에서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일 것이다. 교회가 질서가 바르게 되면 이단대처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끝으로 교회의 주권자가 교인이 아니듯이 오늘날의 목사직도 사실상 초대교회 감독의 위치는 아닌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지금 있는 질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기에 교인은 교회의 목사라는 직분에 순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감독이 아니더라도 교회의 교사라는 위치는 분명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교인들은 기억해야 된다.
현재의 교회질서를 개혁하자는 것이며 현재의 질서를 두고서 교회의 질서를 성경적인 질서로 쇄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일을 위해서 목사도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수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교인들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분이 초대교회의 직분과 다른 위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교회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교인의 직분 중 비성경적인 직분은 과감히 철회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직보다 직분으로 다스려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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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글**
[성도는 만인제사장이며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인이 교회의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논리에 반론한 글]
성도=만인제사장=하나님의 백성=교회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은 자들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구원론의 입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같은 평등한 구원을 말하며 같은 영적인 신분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질서가 수평적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질서는 교회론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감독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수직적인 교회의 질서입니다.
이를 구분해야 됩니다.
문제는 오늘날 구원론과 교회론에서 구원론만 강조해서 평등을 주장한다면 교회는 교인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회중정치가 아닌 교회의 감독과 장로와 집사로 다스려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다스리는 원리가 적용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마치 무질서가 아닌 질서대로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며 우리는 제사장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인 구원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육적으로 또한 존재하기에 즉 영적으로 불렀지만 육적으로 존재하기에 땅에서 그들을 다스리는 질서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직분입니다. 직분이 필요 없다는 것과 만인제사장은 다릅니다.
**먼저 구원론인 성도와 만인제사장을 생각해봅시다.
이 논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연관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든 성도는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관되어서 나타나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영적인 질서입니다.
우리의 육적인 질서와 분리된 것입니다. 가족의 질서나 그리고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 질서입니다. 약하고 강하고 또는 그 어떤 장애도 없이 같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교회가 세상에 있기에 육적으로 그들은 존재합니다.
육을 가진 사람들에게 육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가족의 질서 국가의 질서 등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육체를 가진 사람들에서 나타납니다. 그와 같이 세상에서 교회도 육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자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하늘의 통치 받는 방법이 동원됩니다. 육체를 가진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육적인 신분이 아닌 영적인 하늘의 신분을 육체를 가진 자들에게 부여한 자들이 교회의 감독과 같은 직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사도를 그리고 감독 그리고 장로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하늘의 영적인 통치를 위해서 육체를 가진 자들에게 주어진 임시적인 신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