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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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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청빙 사역자(수정자료)

작성자
김인찬
등록일
2005-01-13 00:00:00
조회수
1186
첨부파일
아래 글은 수정이 될 글입니다....부족한 글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기독교가 간과한 바울의 이원론을 통해서 본 것입니다.
영지주의와는 다른 성경적인 이원론입니다. 

========[성경적인 이원론과 구원적용]===========

삼위일체는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면서 다른 사상들을 강력히 경계하게 되는데 그 중에 양태론을 이단으로 정죄하게 이른다.

또한 영혼과 육의 구분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신학이 실패한 것은 영지주의 라는 사상에 의해서 영지주의 이원론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성경 적인 이원론도 현저히 약화시키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적 이원론은 무엇인가?
영지주의는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사상일 것이다. 이는 영지주의의 근본이 사람 중심에서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달리 성경적인 이원론은 영혼과 육체가 있으며 육체는 유한하지만 영혼은 영원하다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실재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가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실존적인 이해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이원론은 여기에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이해에 있어서도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깊이 이해하는 성경적인 이원론을 과거에는 간과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삼위일체와 같이 영혼육 일체로 본 것 같다. 영혼과 육체를 일체 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이해하는 사상의 결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럼 사람의 육체와 영혼과 두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려고 한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있듯이 성도들에게도 육체의 질서와 영의 질서가 있다.
육체의 질서는 육체가 사는 기간까지이다. 그 기간에 사람은 육체의 질서가 있는 것이다.

***먼저 사람의 육체의 질서는 아래와 같다.***

그 질서는 원초적인 가족관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대가족으로 연결된다.

그 질서는 원초적인 남녀 관계이다. 이는 확장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남자와 여자로 나뉜 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며 결혼도 그렇다.

그 질서는 세상의 정치이다. 이는 세상의 도덕과 질서를 유지한다.
부족정치, 왕권정치, 봉건정치, 민주정치 등 세상에 이러한 정치가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영혼의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구원의 신적 관계이다.
하나님이 영혼의 아버지가 되신다. 물론 이러한 관계는 성도에게 해당된다.
성자가 우리와 영적으로 교회의 관계가 된다. 성도들은 몸이며 그리스도는 머리가 된다.
성령은 우리를 영적으로 도우신다. 우리의 기도 우리의 예배 등 영적인 일을 돕니다.

이 영적인 질서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이 영혼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육적인 세상 안에서 예수로 모인 영적인 자들이다.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이 교통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역사 하신다.

*이렇게 세상에 사는 성도들에게 두 질서가 있다. 하나는 육적인 세상의 질서이다.
또 하나는 영적인 질서이다. 이 모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성도들이다.

*불신자는 육적인 질서에 있으면서 또한 그들은 사탄과 관계된다. 그들의 영혼은 사탄의 포로 된 자들이다. 그들의 영혼은 사탄의 역사로 타락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 곧 공중권세 잡은 자에 속하여 있다. 이 세상을 심판할 때에 사탄과 불신자들이 함께 심판된다.

그러면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먼저 죽은 자들은 영혼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육체의 질서가 해당되지 않는다. 영혼의 질서가 있다. 육체의 질서와 달리 영의 질서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고 오직 하늘의 천사와 같다. 이렇게 그들은 하늘의 성도들이다. 

이 땅에서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고 죽어서도 영혼의 아버지가 된다. 이는 우리가 영혼의 아버지를 두고 예배를 드린다. 이와 같이 성도의 영적인 질서는 변동이 없다. 

불신자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불신자도 영혼으로 존재하면서 그들은 사탄과 함께 심판을 기다린다. 그들은 세상에서 영혼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하고 구원의 영적인 질서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불신자들은 사람을 유혹하고 넘어지게 한 사탄과 함께 심판 때까지 기다린다. 

예수는 선악간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혼에 육체를 입히시고 죽은 음부의 영혼에 육체를 입히신다. 그리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음부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으로 나아간다.

이 세상에는 성도의 영적인 질서 곧 성령과 우리의 영혼이 교제하고 교류하는 질서가 있다.
이 세상에는 불자의 영적인 질서 곧 악영과 그들의 영혼이 교제하고 교류하는 질서가 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 역사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었다.

이 세상에는 모든 육체에 동일한 육적인 질서가 있다. 앞서 말한 육체의 질서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육체와 영혼으로 나타난 두 질서가 존재한다. 이원론을 주장한 영지주의를 배격하다가 성경적인 이원론까지 잃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카톨릭이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질서를 구분했다면 죽은 영혼에게 기도하지 못할 것이다.
개신교도 역시 영혼과 육체의 통일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에 있어서 그 기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 ======= ========


 
***[(성경적 세계관이 분명히 드러난다)]***성경적 이원론 접근



육체와 영혼==실재와 영적===죽음과 부활==죄와 의==죄의 법과 생명의 법==악영과 성령==어둠과 밝음==하늘과 땅==영원과 시간==선과 악 신자와 불신자=교회와 세상=낙원과 음부... 등 두 가지로 설명되는 것 중에 바울도 다수 사용하였다.
신약과 구약==그림자와 실체==창조주와 피조물==상대적 이원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이원론적인 사상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원론의 출발은 악이 나타나자 하나님은 그 악과 선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 세상은 선악간에 영적인 싸움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천사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이원론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상해보면 빛만 있었고, 죽음이 없기에 부활이 없고, 그 자체가 선이기에 악이 없었고, 죄가 없기에 의가 필요치 않고 영원이기에 시간의 설정이 필요치 않고, 

영적인 두 싸움이 없기에 평화만 있었고, 하나님은 창조주보다 영원한 주재가 되시기에 우주만물의 피조물이 필요치 않았고, 하나님의 세계가 천국자체이기에 지옥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악영으로 나타나 하나님과 대적하자 하나님은 두 세계의 질서를 분리하게 된 것이다. 지상이라는 땅은 사탄이 불법한 정복자로 있으며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변동이 없고 영원한 그 세계라는 것이다. 죄인이 하늘에 가는 것은 죄가 있으면 안 되면 또 상대적인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이러한 자들을 하늘로 귀속시키고 땅에서 영적인 전투를 위해서 예수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땅에서 승리한 것이다.

죄인이 하늘에 갈 수 없기에 하늘에 갈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낙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썩어지는 육체로는 갈 수 없고 또 죄가 있으면 갈 수 없다.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갈 수 있는 곳이 라는 것이다. 그래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 아들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죄와 연결되면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육체와 그 죄를 죽여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사신 것이다.
그 영혼을 두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지 육체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육체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체의 질서가 하나님의 질서로 바뀌어야 된다도 주장해야 한다.

즉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육체의 질서 무시하고 하나님과의 질서를 주장해야 한다. 국가도 세상의 국가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되는 지상 과제가 나타난다. 또한 육체를 포함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는 성도들의 전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세상은 세상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교회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정종분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의 질서와 육의 질서를 구분하지 않으면 영의 질서가 육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역사가 카톨릭의 역사이다.
혹은 미국이 지금 기독교가 아닌 나라를 적으로 보는 즉 다른 종교를 섬기는 나라를 육적인 적국으로 보는 행위는 이러한 사상이 기초한다. 세상에 세상나라에서 신국은 없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그 나라의 백성도 그렇고 그 나라의 영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그 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영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탄과 성령 그리고 불신자와 신자 그리고 세상과 교회라는 공식은 육적인 구분이 아닌 영적인 곳에서 구분하는 것이다. 육적인 나라와 나라 육적인 가족질서 육적인 모든 것은 그대로 있다. 아군과 적국 등이다. 이러한 나라는 세상에 속한 나라이다.

우리가 어떻게 영의 질서에 속하게 됐는가? 그것은 우리가 육으로는 세상의 질서를 영으로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다. 보이는 나라의 질서도 지켜야 되며 보이지 않는 나라도 지켜야 되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야되며 하나님께도 바쳐야 된다. 육적인 질서와 영적인 질서를 혼동한 과거의 역사는 종교가 국가를 지배한 것이다. 종교가 사람을 심판해서 죽인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범죄이다.

그러한 일을 정당화 한 것은 바로 일체사상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에 주인이라는 사상은 우월주의를 내세워서 다른 나라를 정복해도 좋다는 신학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한 범죄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도 나타난다.

미국의 전쟁이 예이기도 하다. 종교전쟁이 아닌 것이다.
이라크 등 종교와 국가가 일치인 나라는 다른 나라가 공격하면 단순한 국가적인 전쟁보다는 신전 곧 성전이 된다. 민주주의는 사실상 성경적 원리가 적용된다.

종교의 자유는 사실상 세상에서 국가와 종교를 분리해준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국가가 일치된 나라에서는 다른 종교를 국가의 적이 되거나 혹은 국가적인 통제나 핍박을 받는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이 땅에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민주주의에서 정상적인 기독교가 국가와 충돌을 면하는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의 직분과 세상의 직분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종교의 헌금과 세상의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정종분리라는 기본적인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극 보수주의자들은 국가와 연합된다는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고 개입하는 것 혹은 다른 종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 또는 국가가 하는 일에 종교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돕거나 반대하는 것 등이다. 

물론 국가에서 기독교를 소외시키는 것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교회가 대모를 하거나  물리적인 힘을 쓰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는 교회가 국가에 직접 개입하는 행위 등도 잘못이다. 만약에 국가에서 교회를 탄압하면 교회는 당하는 것이나 혹은 피하여 도망하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국가의 한 시민으로써 국가에 대모 하는 것은 가능하다.(법적인 안에서)
목사는 시민이면서 종교인이다. 그러기에 세상법도 지켜야 하고 성경도 지켜야 한다.
만약에 세상의 국가가 불법과 그리고 악을 행한다면 종교인으로써 지적하는 것이 아닌 한 시민으로써 국가에 개입해서 대모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정상적인 일에 대해서는 온전히 순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이러한 육적인 질서도 성도들이 잘 지키라고 했다.(육적인 것도 하나님의 질서) 그러므로 세상의 불법과 타협하는 것은 영적인 질서에 의해서 고치고 시정하려는 것이 아닌 육적인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가 일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육적인 질서도 선하게 다스리고 또는 순복 해야 됨을 가르친다.
그러나 육적인 질서와 영적인 질서가 충돌하는 경우는 먼저 영적인 질서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사실상 충돌할 일이 없지만 과거 오해로 기독교에도 예수라는 왕이 있고 또는 기독교의 하나님 대신 일본의 천왕께 경배하라는 것들이다. 

이러한 요구는 사실상 육적인 질서가 영적인 질서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육적인 질서도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권한을 인정했지만 영적인 질서에 도전하는 권한은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과 맞서 물리적으로 싸우는 것도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교회는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로 핍박을 받으면 오히려 하나님이 성도들로 인하여 상급을 더하신다. 사람이라는 왕에게 신적인 부여를 하면 이는 신에 도전이며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러한 행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핍박을 가한다해도 굴복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권한을 하나님이 육적인 질서에 주지 않았고 또 신적인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세상의 질서를 까다롭게 운영한다면 이는 순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한을 하나님이 주셨다. 또 성도들간의 문제를 세상의 법을 빌려서 해결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지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육적인 질서만 있는 것이 아닌 영적인 질서가 요구된다. 교회의 감독에게 순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은 두 질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국가에서 목사에게 강제로 일을 시킨다면 순복해야 한다.
국가의 질서이다. 목사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일인 교회의 감독으로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 만약에 교회를 다스리지 못하게 한다면 목사는 신적인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육적인 요구를 포기해야 하면 국가가 물리적인 힘으로 핍박을 한다해도 믿음으로 이겨야 된다.

이렇게 육적인 질서와 신적인 질서가 우리에게 있기에 성도의 도덕성은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육적인 질서를 지키는 세상사람들보다 성도가 악하다면 그 구원을 누가 보장하겠는가? 신적인 질서를 지키는 것은 교회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세상은 항상 그렇듯이 육적인 질서만 앞세운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가 교회적으로 혼란을 가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파악을 해야한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신본주의 이다. 영적인 질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오늘날 세속화 되었다.
신적인 질서 대신 육적인 질서를 교회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한 질서로 말미암아 교회는 심각한 영적인 혼란을 가중시킨 것이다.

카톨릭은 과거에 왕권정치와 결탁해서 수 없이 교회가 월권을 행사했다.
오늘날은 조용한 것 같으나 이미 이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악과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한 이단이다. 그러나 개신교도 이제 서서히 세상 속으로 깊이 발을 들여놓았다.

개신교는 이제 이러한 성경적인 이원론으로 육적인 질서와 신적인 질서를 깨달아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법정으로 가고 교회에서 학교를 세우고 교회에서 노조를 만들고 교회에서 국가의 인가를 받아야 되는 오늘날 개신교 특히 보수주의는 각성해야 된다.

이러한 사상의 저변에는 일체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보수주의는 하나님이 모든 나라를 소유=삼위일체=영혼육 일체=하늘과 땅 일체
보수주의 신학은 철저히 일체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오히려 국과와 교회를 구분하는 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 글에서 주장한 질서가 성경적이라면 이론도 성경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과거에 무조건 배척했던 이원론을 성경적 이원론으로 정립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도록 개혁해야 한다. 보수주의는 정작 일체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는 사분 오열되었고 교회는 세상보다 더 잘 싸우고 교회가 세상의 제도와 결탁하고 교회가 이제 세상의 기준보다 낮다는 어처구니없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제 성경적인 교회 곧 영적인 질서로 회복해야 한다.
그러한 일을 위해서 개혁하는 일에 우리모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이다

\\\\\\\\\\성령세례와 이원론\\\\\\\\

물세례란 무엇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는 
물로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다. 성령이 임했다.(성령세례)
물은 죽음과 장사지냄을 의미이다.
물은 홍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가 죽는다는 세례를 의미한다.
물세례와 같이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령세례이다.
물은 죽음과 장사지냄을 강조한다. 부활보다 죽었다는 상태를 강조한다.

예수의 죽음은 물 속에 들어가 죽은 것 같은 세례이다.
예수와 함께 성도들도 영적으로 함께 죽는 신비한 연합이 성령으로 나타난다.

롬6:3-4에서 알 수 있듯이 물세례의 의미는 부활이 아닌 장사지냄 곧 죽음을 알 수 있다. 부활은 바로 이러한 물세례로 죽은 자가 일으킴을 영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일단 물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례가 예수와 함께 죽고 산다는 의미보다 세례자체는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물세례와 같은 영적 장사지냄을 통해서 새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생명은 영적 부활의 상태와 같이 살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는가?
그 이유는 살아있는 자들은 반듯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는 일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예수와 현재의 내가 함께 실재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령으로 영적인 죽음인 불 세례가 있는 것이다.

다음은 죄와 죄의 몸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자
로마서 6장 6절에서 죄의 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 
즉 영혼육을 가진 살아있는 육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 육체를 강조할 때 몸으로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죄의 몸을 가지고 있다.
죄의 몸은 또 죽을 몸이라고 기록한다(롬8:11)
이렇게 사람의 살아있는 육체는 죽을 몸이다. 그리고 죄의 몸이다.

그러므로 죄의 몸이 죽으면 그 원죄가 끝난다.

그의 죽음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고 바울은 말한다.(롬6:10)
이는 원죄의 육체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이 죄에 대해서 죽었기에 예수와 연합되어 죽은 자는 죄에서 해방된다.(롬6:18)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는 죽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자가 된 것이다.(롬6:11)

그러므로 우리 육체가 실재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롬6:11)

육신을 쫓아서 사는 것과 성령을 쫓아서 사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롬8:5)

육신을 쫓아서 사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육신은 육을 지향하지만 육 자체보다는 육체 안에 있는 죄를 가리킨다.
그것은 죄의 몸을 따라서 산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몸 안에 죄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람의 영혼이 육체의 죄 즉 육신을 쫓아서 사는 것으로 이해해야한다.

성령을 쫓아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죄를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닌 영(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한다. 내가 성령을 쫓아서 사는 것은 육체와 죄를 쫓아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영이 성령을 쫓아서 살 때에 육체를 복종시킨다. 죄를 이긴다는 것이다.

성령이 오순절 날 육체에 부으심은 바로 육체를 영적으로 죽이기 위해서(성령세례) 임한 것이다. 그래서 육체의 부으심을 강조한 것이다.(성령세례는 영적으로 육체를 죽임)
성령이 육체에 부어짐으로 그의 육체를 영적으로 장사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은 육신 안에 있는 죄에서 자유하고 해방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마음과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은 외적인 기능보다 내적인 속성을 강조한다.(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이나 신체적인 움직임과 같은 외적인 기능은 아니다)

마음은 내 영의 속성이며 육신은 육체의 속성이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생각을 창출하고 육신은 정욕과 죄 성을 창출한다.

내 마음은=하나님의 법=성령을 쫓아서 살아야 한다.=성령의 열매=의의 종
내 육신은=죄의 법=육체의 정욕과 죄성=죄의 열매=죄의 종

이렇게 두 법이 공존하는 것은 육체와 영이라는 이원론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법이 발생되는 시작은 성령이 내 육체를 영적으로 죽이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세례이며 중생이며 영적 연합이다.
결론으로 성도는 몸은 죄를 위하여 죽은 것이나 영(영혼)은 의를 위하여 산것이다.(롬8:10)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적 이원론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의 [육체]은 그리스도의 [유한한 육체와 부활의 육체]=예수의 육체와 죽고 사는 것
사람의 [영]은 [성령과 성령의 열매]와 연관된다.===성령세례와 내주의 역사

1.사람의 [육체]는 [원죄]와 연관된다.=육체가 죽으면 모든 사람의 원죄는 자동으로 끝난다.
2.사람의 [영]은 [자범죄]와 연관된다.=내 영이 살아생전 지은 자범죄를 해결해야 낙원에 감 

일번은 모두 해결된다. 예수의 부활은 모든 육체가 부활하는 근거가 된다.(모든 육체)
이번은 모두 해결되지 않는다. 예수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죄사함을 얻는다.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도 사람의 [육체와 영혼]과 [그리스도의 육체와 성령]으로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서로 영적으로 결합되고 연합되면서 나타난다.
즉 내 육체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육체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내 영이 산영이 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의 사건도 이원론으로 접근한 것이다.
죄의 종과 의의 종 그리고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나뉜다.
죄의 종은 옛 상태이며 시간적으로 이미 과거가 된 것이다.

새 사람은 거듭난 현재의 상태이며 예수와 연합된 자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연합되는 것과 함께 영적인 본질적 연합이 있다.
이러한 영적인 연합은 성령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다.
종합하면 성령으로 예수와 함께 내 육체가 죽고 성령으로 내 영이 예수와 함께 산 것이다.  

그러면 왜 과거에 이원론이 무조건 비판을 받았는가? 
초대교회 영지주의 그리고 신학의 부제와 교리신학에 의해서 오히려 자유로운 신학의 연구을 차단한 이유가 아닐까? 이단은 배척되어야 한다. 그러나 연구하는 것까지 무너지게 한 것은 역사적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 영지주의 이원론은 연합사상보다는 사람 중심으로 출발 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이원론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타난다. 두 영적인 실존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영적 두 실존의 연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성경적인 이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원론에 대한 거부를 없애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이원론으로 전개된다. 그것은 과거 교회가 영지주의 배척보다 더 중요한 성경적인 이원론 신학을 분명히 정립했어야 했다. 교리신학 그리고 무분별한 이단 정죄는 성경을 오히려 닫아버리는 역효과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해가 있다.

그것은 영적인 사건적용과 실재적 사건적용이다. 
즉 영적인 적용과 실재적인 적용이 구분되면서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울신학의 중심인 영적 연합사상이 있다면 또 하나는 실재적인 사건이 있다.
이러한 이원론들은 성경적인 이원론이다. 세상은 결코 만들 수 없는 이원론이다.

성도는 한번은 영적으로 죽고 또 한번은 실재로 세상을 떠나는 죽음이다.(부활도 이와 같다) 
왜냐하면 두 번 죽음과 또 두 번 산다는 것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니고데모는 혈통으로 한번 태어나는 것만을 알고 있었지 성령으로 태어나는 중생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니고데모의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일 뿐이다.

영적으로 이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번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재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죽음이 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들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적인 죽음과 부활이 있는가 하면 실재로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과 재림의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영적으로 죽은 성도들만이 실재로 죽어서 내세(낙원)에 이른다.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예수와 함께 하늘에 있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살아있을 때에 영적으로 미리 죽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실재적으로 우리가 죽을 때에 적용되어버린다.

또 영적으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것도 두 번 이해된다.
영적으로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영적으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영적인 부활에 참여한 영이 있다. 그들은 성도들의 영혼들이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 것이다. 그러한 영혼이 실재로 육체의 부활을 얻을 것이다. 바로 그 때가 재림이다. 

재림은 모든 사람이 육체로 부활을 하지만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는 것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먼저 영적으로 일으킴(부활)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죽으면 낙원에 가는 첫째부활에 참여하듯이 둘째 부활도 성도들이 먼저 적용된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순서이다. 

성경은 죽은 성도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끌어올려 진다는 것이다. 사실상 실재적 부활의 육체를 입는 상봉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순서는 마땅하다. 죽은 자가 먼저 세상에서 예수와 함께 영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먼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그 후에 세상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부활체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재적 죽음과 실재적 부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실재적 죽음은 앞서 말한 대로 예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으로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은 죽음으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다. 이것이 실재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실재적인 사건으로 성도들의 영혼만 낙원에 이른다. 그리고 불신자도 죽게되면 실재로 그들의 영혼이 음부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실재적인 사건이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실재적인 사건이 구분된 그 시작은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가 죽자 그의 죽음이 모든 세상사람들을 위한 죽음이 된 것이다.(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구약의 성도들의 영혼이 음부에서 낙원으로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음부에 있는 불신자들의 영들은 그대로 최후 재림심판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실재로 적용되면 죽은 자들에게는 음부와 낙원으로 그리고 부활 후에는 영벌과 영생으로 나타난다.(양과 염소) 이렇게 나타나는 이유는 예수가 실재로 죽었고 부활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은 죽은 자들에게 음부와 낙원으로 구분되었고 예수의 부활로 영벌과 영생으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은 실재로 적용되는데 어째서 영적인 연합 혹은 신비적인 연합이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미 성취된 예수의 죽음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제 구원을 얻으려는 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믿어야 되며 예수의 부활을 믿어야 된다. 그 이유는 개인들이 죄사함을 얻어야 되는 중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불신자와 신자로 나뉘어지는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낸 것이다. 세상에서 성령은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모으고 그들을 교회로 만든 것이다. 그 교회는 예수로 불러진 자들이다.

성령은 이렇게 미리 영적으로 죽게 하는 일을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적인 육체의 죽음 곧 원죄와의 결별이다. 성도는 사실상 원죄와 무관하다. 문제는 자범죄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례시 사실상 과거의 자범죄는 모두 해결된 것이다. 문제는 현재와 미래의 것까지 해결된 것인가?

구원파는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결이 된 것보다는 자범죄는 해결되어 간다고 보아야 한다. 
실재 내가 세상에서 죽어야 예수의 과거 실재 죽음이 적용된다. 
자범죄 문제는 다르다. 실재 자범죄는 실재로 죽었던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로 사함을 계속 얻어야 된다. 

원죄는 내 육체가 실재로 죽으면 끝나지만. 자범죄는 내가 살아가면서 실재로 해결해야 한다. 그 자범죄의 해결 방법은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가 항상 유효하기에 가능하다.

성도는 영적으로 예수와 함께 죽고 산 것은 사실이다.
이는 두 상태 [육체와 원죄] 그리고 [내 영과 성령]으로 구분된 관계로 나타난다. 
영적인 분리이지 실재적인 분리가 아니다. 그리고 거의 육체(원죄)와 분리되는 관계이다.
영적인 연합은 사실상 자범죄를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원죄를 설명하는 것이 강하다.

그래서 로마서의 연합사상은 원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연합된 내 영이 이미 원죄하고는 분리됐다고 하더라도 내 영이 원죄를 따라서 죄를 지으면 당연히 회개하여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리스도와 죽고 사는 연합사상은 내가 영적으로 죽은 것과 영적으로 산 것이다.(영적)
그리스도와 죽고 사는 실재역사는 내가 실재로 죽는 것과 내가 실재로 부활하는 것.(실재)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연합사상은 단순히 죽고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죽음을 강조)
이는 자범죄의 해결을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결과론 적인 입장 원죄에서 해방을 주장하게 된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는 주장도 원죄에서 해방됨을 말한다.(분리) 

그리스도와 죽고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이미 과거가 되고(옛 사람) 그리스도와 현재는 산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본다면 자범죄도 사라진 것으로 만든다.(구원파)

내가 세상에서 육체로 살아 있을 때에 내 영이 내 육체의 원죄로 지었던 자범죄는 용서받기 전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용서를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자범죄는 내 영이 지은 것이다.
해결 못하면 죽어서도 내 영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회개함으로 사함을 받아야 한다. 성도는 성령과 함께 살면서 내 영이 지은 죄를 항상 용서받을 수 있다. 

이렇게 영적 연합으로 참으로 분리된 자는 내 속 사람이라는 영이 원죄를 따라서 자주 자범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 곧 예수의 사람은 과거와 달리 살아야 한다. 과거에는 죄를 따르는 내 영이었다.(죄의 종)

그러나 이제는 의의 종이다. 그가 예수를 따라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성령을 따라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에게 내가 원치 않는 보이는 죄가 종종 드러나면 그 나타난 죄는 육신 안에 있는 원죄의 것이다.

내 영이 원하지도 않는데 내 육신의 원죄로 보이는 죄가 드러나는 경우이다. 물론 이러한 죄를 보고 바울은 탄식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 것인가 라고 깊이 탄식한 것이다. 중생 자들도 믿는 성도들에게도 역시 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내 영이 원치 않는데 육체의 원죄로 나타난 죄가 나도 모르게 나오는 것이 있다. 
하나는 내 영이 원해서 육체의 원죄를 따라서 나타난 자범죄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책임인 그의 영이 짓는 자범죄와 육체의 소욕을 일으키는 원죄를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원파는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일시에 해결하는 신앙으로 설명한다. 이는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정통신학에서는 원죄와 자범죄를 형식적으로 구분했지만 사실상 원죄보다 자범죄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회개의 강조가 강하다. 카톨릭은 더욱더 그렇다.(미사 등) 그리고 의인됨을 강조하지 않았다. 구원파에서 의인이라고 주장하자 개신교는 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강하게 대치한 이유가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이제 원죄와 자범죄 육체와 영 그리고 실재와 영적인 연합을 구분하는 시도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중생 된 자는 이미 영적으로 원죄하고는 끝났다. 그래서 오늘 죽게 되어도 낙원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자범죄는 산 자들이 계속 해결해야 되는 것이다. 사실상 원죄는 모든 산 자가 죽으면 끝난다는 것이다. 즉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지 사실상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원죄는 그들이 죽으면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살았을 때의 자범죄이다. 성령세례는 이렇게 사실상 끝난 육체의 원죄를 확인하는 것이며 그리고 부활의 생명과 같이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 육체를 가지고 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는 죽었다.
그리고 세상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죽으면 육체의 원죄하고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원)를 그쳤다고 증거 한다. 

그런데 산 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먼저 믿고 부활을 먼저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즉 가만히 있어도 육체의 원죄는 끝나고 또 부활도 모두 일어날 것인데 왜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사실은 육체적 원죄의 끝은 결과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영이 육체로 살면서 지은 죄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범죄이다. 
이 죄는 반듯이 용서함을 받아야 된다. 구약의 백성들은 언약의 제사로 말미암아 예수가 죽자 그 언약이 이루어짐으로 죄사함을 얻었다. 언약의 백성이다. 

그리고 신약의 백성들은 기다린 구약의 언약과 달리 믿음으로 새 언약에 곧 바로 적용되어서 실재적인 자범죄의 용서함이 일어난다. 예수의 제사는 영원한 대 제사라면 우리는 그 제사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는 원죄의 해결이 아닌 사실상 자범죄의 제사이다.

원죄의 해결은 예수이다. 예수가 육체를 버림으로 그가 원죄를 해결한 것이다.
마치 아담이 원죄를 가지고 왔듯이 예수는 원죄를 없애는 육체의 죽음을 감당한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육체로 사는 동안 원죄는 존재한다. 우리가 죽어야 예수의 죽음으로 원죄가 없어지는 것이 실재적으로 적용된다.

우리는 자범죄가 육체로 사는 동안에 국한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육체로 사는 동안 그 영은 죄를 짓고 살아간다. 그러나 육체를 벗는 순간 그는 영원한 낙원으로 들어간다. 그가 낙원에 갈 수 있는 것은 먼저 원죄(아담으로 온)을 해결하기 위해서 육체로 죽은 예수가 있으며 또 살았을 때에 내 영이 육체의 원죄로 지은 모든 자범죄를 용서함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도 이중적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예수의 육체적 죽음은 원죄의 끝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은 자범죄를 대신한 고통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살면서 자범죄를 지은 것을 대신해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 

그의 고통은 원죄의 것보다는 사람들이 살면서 지은 자범죄의 것이다. 육체의 끝은 모든 원죄의 끝이다. 자범죄를 해결하는 것은 예수가 자신의 죄(자범죄)를 위해서 고통 당하였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예수의 공로로 자신의 죄(자범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성경적인 이원론이 구원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생각해보자.
구원에 있어서 육체의 기간과 영혼의 기간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생각해야 한다.
개신교나 카톨릭 모두 삼위일체을 강조하고 또 영혼과 육을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구원에 있어서도 구분하는 것이 약화된 것이다.

육체의 원죄와 영혼의 자범죄가 있다.
사탄의 역사로 그 사람의 영혼이 육체의 원죄로 말미암아 짓는 자범죄가 있다. 
성령의 역사로 그 사람의 영혼이 성령으로 육체의 죄를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있다.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영혼이 믿음으로 얻은 열매로써 성령은 그 예수의 의를 얻은 자들에게 내주 하여서 역사 한다.

이렇게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얻으면 그는 의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과거 죄인만을 강조한 것은 영혼과 함께 역사 하는 성령의 역사를 약화시킨 것과 의인이 된 것을 약화시킨 것이다. 사실상 육체중심은 죄인중심이었다. 

죄인중심은 계속적인 회개만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게 된다.(자범죄 중심)=정통신학
의인중심은 완전한 구원의 의를 얻은 것을 강조한다.(원죄 중심)=구원파

구원파는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지 않고 원죄중심으로 이해한 것이다. 
또한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는 것보다 단순히 사람을 의인으로 말한다. 그러나 원죄가 육체의 것이라면 자범죄는 영혼이 육체로 지은 것이다. 영혼이 지은 것은 영혼이 책임지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이렇게 원죄는 육체 안에 죄가 있는 것이라면 자범죄는 영혼이 육체의 원죄로 지은 영혼의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육체의 원죄를 없애는 것이 아닌 자범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이다.
또한 육체의 원죄는 육체를 떠나면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 영혼이 육체의 원죄로 말미암아 지었던 자범죄는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한다면 영혼이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육체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다. 육체자체는 악한 것이 아닌 육체 안에 죄가 있다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 육체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은 영지주의와 다른 것이다. 구원파는 원죄 중심으로 사람을 보았고 정통주의는 자범죄를 강조한 것이다.

성경적인 이원론은 성경에서 증거한다.
[육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은 신학에 의해서 상당히 차단되었기에 구원에 있어서도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의 삼위관계를 차단시켰기에 신론에 있어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과 같다. 두 세계일체에 의해서 카톨릭과 같이 사람의 질서로 하늘의 질서를 통일시킴으로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숭배하는 사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람의 육신과 함께 하는 죄(원죄)

죄(원죄)와 관계된 것들을 찾아보면 육신과 연관된다.
죄(죄의 종)=사망(사망의 법)=율법의 행위(사람의 행위) 등
죄에서 해방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한다.(영적)

성경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증거] 한다(영적으로 육체가 죽음) 
로마서의 증거
(6:11)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
(6:12)죄로 너희 죽을 몸

**사람의 영과 함께 하는 의

의(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을 찾아보면 영과 연관된다.
의(의의 종)=생명(성령의 법)=은혜 안에(하나님 사랑) 등
의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죽은 자가 살아난 자를 가리킨다.(영적) 
이미 영적으로 육체가 죽은 자가 그의 영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등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영은 의를 위하여 산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산영이 된 자이다.
이러한 산영과 성령은 서로 교통하고 함께 한다. 혼합이 아닌 교통이며 우리를 위해서 일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과 성령의 내주와는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며 성령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의 내주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증거는 성령이 거하는 것이 증거이다.(롬8:9)

바울이 로마서에서 육신이라고 말할 때는 영혼이 있는 산 사람을 말한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육신에게 져서 살지 말라는 것은 사람이 육신대로 즉 육신 안에 있는 죄를 따라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 육신에 속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는 육신의 죄를 따라서(육신의 종이 되어서) 산다는 것이다.
내 영이 육신의 죄를 따라서 살았던 것이 죄와 사망의 법안에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영적으로 육신이 죽은 자는 육신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이미 죽은 자는 그가 육신 안에 있는 죄의 종이 아닌 그의 영이 성령을 따라서 사는 의의종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을 따라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내 영이 육신의 죄를 따라서 살았다면 이제는 내 영이 성령을 따라서 살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내 영이 성령을 쫓아서 살게 될 때에 그는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육신은 육체와 죄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 즉 단순한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닌 사람의 육신은 육신의 죄를 포함해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보통 이원론으로 구분했습니다.
[사람의 육신+죄]:[사람의 영+성령]으로 구분했습니다.
[육신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 죄의 종과 의의 종]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밷전3장 21절=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여기에서 선한 양심이란 영의 기능이며 영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육체는 양심과 다르지요...

로마서 8장 10절=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위하여 산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이는 바울의 연합사상과 같습니다.

초기에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보이는 세례는 사실 아주 초기에 주어진 것입니다.(성경적) 그러나 영적인 보이지 않는 신비한 연합은 성령과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영적인 연합 곧 영적 세례입니다. 참으로 의인된 즉 칭의 된 자는 이러한 자들입니다. 사실 영적으로 죽고 산다는 것이며 로마서는 이를 강조한 것입니다.

두 가지로 이해하는 것=(실재와 영적)
1.실재적 죽음은 육체가 실재로 죽는 것을 말한다. 실재 사는 것은 부활
2.영적인 죽음은 육체가 영적으로 죽는 것을 말한다. 영적 사는 것은 성령의 내주

성도에게 위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즉 영적인 죽음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성령이다. 성령세례는 이러한 영적인 죽음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재적인 죽음이전에 사람의 죄를 사하는 일을 위해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미리 죽게 한다는 것이다. 성령은 실재로 죽기 전에 영적인 죽음을 이루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러면 영적으로 죽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신비적 연합)
먼저 모든 살아있는 성도가 성령세례로 모두 영적으로 죽는 것은 일반이다. 
성령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 죽음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영적으로 장사지내게 되는 것도 일반이다.
그런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것은 또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믿음으로 출발한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출발한다.*(세례)*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아서 죽는다. 그리고 장사지내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장사지냈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온전히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으로 출발하지만 육체로 망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성령으로 십자가에 죽었는데 그가 온전히 자신을 장사지내지 못하고 영적인 일으킴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께로 인도되지 못한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자들은 모두 성령으로 일으킴을 얻지 못한 자들 즉 성령의 인침 칭의를 얻지 못한 자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이 세상에 임한 것은 바로 영적인 역사 곧 성령세례로 사람의 원죄와 자범죄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성령이 없는 자도 죽으면 원죄는 자동으로 없어질 것이다. 즉 육체가 죽으면 원죄에서 떠난다. 그러나 자 범죄는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제사가 무엇인가? 죄를 해결하는 제사였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사를 구약에서 드린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는 죄 사함을 주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십자가) 이러한 고통은 사람의 자범죄를 해결하려는 고통이었다.

그러한 예수의 영원한 제사로 사람들은 자범죄 사함을 얻게 된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 그런데 어떻게 자범죄 사함을 얻는가?
성령으로 그는 자신의 죄를 사함 받게 된다. 믿을 때에 그는 과거의 자범죄는 일시에 사함 받고 또 앞으로도 지은 죄도 회개를 통해서 계속 사함을 받게 된다.

실재로 우리는 살아있을 때에는 영과 육이 분리되지 않고 연합되어 있다.
이 상태는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이다. 실재로 죽어야만 분리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시간이 지나야 해결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이렇게 사람이 죽으면 육체의 원죄하고 사람의 영(영혼)이 분리된다. 그러면 이러한 사람은 육체로는 원죄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이 죽음은 사실상 모든 사람이 겪게 되는 것이다.(원죄의 해결은 모든 사람이 해결될 것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은 것이다. 

즉 예수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내어 준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과거 십자가에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의 육체가 죽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부활했듯이 부활한다. 불신자도 신자도 재림 때에 부활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육체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며 세상의 모든 육체를 위해서 부활한 것이다. 

물론 믿는 자들을 위해서는 영생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는 영벌로 나타난다. 즉 예수가 세상에서 죽은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예수가 세상에서 살아난 것은 모든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가 재림으로 올 때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여 심판된다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심판된다는 것이다. 심판주

그가 죽어서 죽은 영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찾아갔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의 영들에게도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증거이다. 

죽은 자들 중 노아의 홍수 때 불 신앙으로 죽은 영들에게 전파된 것은 그들이 음부에 계속 있어야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음부에 그들이 있는 것이 정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예수의 육체의 죽음으로 육체의 원죄는 해결되었어도 자범죄는 그들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은 그들은 예수의 육체의 죽음으로 음부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또 예수가 죽어서 과거 죽은 성도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됐다는 것은 죽은 성도들의 영이 이제 비로써 예수와 함께 영혼으로 낙원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죽어서 그가 홀로 낙원에 오른 것이 아닌 죽은 성도들을 이끌고 낙원으로(토요일) 이른 것이다.

이 사실이 확실히 증거 되는 것은 그가 죽을 때에 무덤이 터졌다는 복음서의 증거는 확실히 구약에서 죽은 영들이 하늘로 오른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불신자들의 영혼과 함께 있다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영들에게 분리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첫째심판 혹은 첫째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원죄가 해결되었는데도 왜 영벌과 영생으로 나뉘는 것인가?
그것은 죄 사함의 은혜가 있었는가? 혹은 없었는가 라는 것이 기준이다.
사람이 예수로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은 육체로 살 때에 지은 모든 자 범죄이다.
그러나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은 자신의 자 범죄를 해결 못한 것이다. 이 자 범죄가 영혼의 것이다. 이 자 범죄가 세상에서 해결되었는가? 혹은 그대로 있는가? 라는 기준이다.

성경은 두루마리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영혼을 깨끗한 영혼으로 묘사한다. 흰옷을 입은 성도라는 의미가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살아있는 성도의 육체적 죄(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 한다. 오히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증거 한다. 옳은 증거이다. 우리는 자범죄를 해결하는 것이지 원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로 원죄는 우리가 사는 육체의 기간에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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